매우 신중했던 성격.
말을 타고 가던 중 강 건너는 길에 외나무 다리를 만나자,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천천히 말이 온전히 건널 수 있도록 인도했다는 일화.
라이벌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숙이고 들어가 충성 맹세.
동쪽 변두리인  에도(도쿄)로 내려가게 되었으니 분노할 만도 한데 쉽게 받아들임.
결국 히데요시가 죽자,ㅡ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유언으로,  60세에 낳은 첫 친아들 히데요리(5세)를
다이묘들에게 잘 부탁한다고 했을때,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목숨바쳐 지켜주겠노라고 맹세.

그간 에도에서 세력을 키웠던ㅡ 마치 한고조 유방이 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 서쪽 끝 영지로 쫓겨나면서 중원과 통하는 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항우를 안심시키고 힘을 키우는 세월을 보냈던 것처럼,,,
ㅡ 이에야스는 패권을 장악하게 됨.
그리고 일본의 역사를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 때 군사들에게 이에야스의 말.
"전쟁에서 집에 돌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적이 나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

히데요리가 장성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옹립하던 세력이 오사카에 집결하자
이에야스가 정적 제거를 위해 출병.
견고한 오사카 성.
오사카 성에 진입하기 위한ㅡ야비한 술책을 씀.
밀정으로 여자 사무라이를 히데요리 어머니에게 보내 항복하면 다 살려주겠다고 약속.
히데요리 어머니는 히데요리를 설득.
협상케 함.
성 주변의 방어용 연못(?)을 이에야스 병사들이 메움.
성 안의 사무라이들은 매우 반대. 이미 때는 늦음.
결국 이에야스의 군대는 견고한 오사카 성에 진입.
10만 명을 학살.
목이 붙어있던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고.
ㅡ인터넷을 찾아보니 오사카성 함락 후 히데요시의 무덤까지 폭파시켰다고 하는데,,,

난징 학살. 간도와 만주의 한인촌 학살,,, 등도 생각난다.
文이 武 위에 있었던 조선과 역사 내내 武 자체가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일본.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文士들의 자기 위안일 뿐이라고 했었나,,김훈의 얘기도 생각난다.
"일본은 야만의 문화"라고 했던 박경리 선생의 말.
임진왜란 때건 20세기 때건 조선을 약탈할 때, 문화나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일본.
그래서 야만이라고 표현했을 것같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나 가쓰라 태프트 밀약 당시의 미 대통령은,
사무라이 할복 등 일본 관련 무슨 책을 읽고는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사무라이 문화에 대해 극찬했다고 하던데,,,
일본의 야만성과 서구 제국주의가 보였던 야만성은 일맥 상통하지 싶다,,,

인터넷서 찾은ㅡ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말 중 >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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