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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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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카테고리 없음 2018. 2. 8. 04:09

늪에 빠져 있었다.

늙었구나.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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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19.

카테고리 없음 2012. 12. 19. 23:36

노무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장자연님의 명복을 빕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쌍용차 노동자 스물세 분의 명복을 빕니다




BLOG CLOSED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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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어차피 저마다 자기식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똑같이 살라는 법은 없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한다. 홀로 있을 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도 일찍이 말했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문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지 혼자 지낸다고 해서 과연 홀로 있음인가.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가르침은 홀로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 개체의 사회성을 말한다. (...)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철저해야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H:

너무 당위적이다,,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긍정적이어야한다, 혼자여야한다

현대문명은 너무 빠르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알아야한다,

시냇물 얘기, 산책할 때의 그런 느낌이 느껴지는데,

전체적 논조는 식상.

 

크리슈나무르티, 말 인용한 부분.

인용된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에만 깊이 공감.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문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 홀로라는 것은 결국엔 홀로있는게 아니라 사람들과 교류하는,,나로서 있음을 얘기하는 것.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 그 모습을 그대로 인정.

사회적 기준에 비춰진 내가 아니라, 그 느낌을 가질 때의 그 평온함이 있거든.

고정된 내가, 틀을 갖춘, 그래야만 하는, OO해야하는 내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걸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더 나아가면 고정된 내가 아니라 공존하는,,

그런 깨달음으로 가는거지.

내 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속에 내가 있는.

 

크리슈나무르티의 홀로라는 말은 낱말 자체를 의미하지않고 순진무구를 얘기.

순진무구란 말. 중립적이고 텅 비어있는 자아를 얘기하는.

선택없는 인식. 어떤 걸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우리는 무엇을 볼 때 이미 판단하고.

어떤걸 볼 때, 그 판단한 것을 남을 깨우치려고 학문적 베이스를 깔아. 나의 판단을 뒷받침하려고,

근데,,

순진무구. 자유. 라는 단어들이. 그냥 쓰는 단어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에서. 자유.라는 말도 크리슈나무르티는 며칠을 생각해서 나왔다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전체적이란 말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가 만들어지기위해선 뭐가 필요한가. 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우주적 원리와 만나게되는.. 나의 뿌리 좇아가다 보면

그게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는.

그런 순진무구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여기의 홀로라는 말에는 홀로 있음같이 있음이 같이 포함되어 있는 말. 전체적이면서 홀로 있고 홀로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근데 법정스님의 홀로에 대한 얘기는 이 말을 빼고의.

부족하다. 크리슈나무르티의 홀로있음을 단편적으로 이해한.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것을 법정스님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법정: 홀로사는 사람은 고독할 순 있어도 고립 되어선 안된다.

맞는 말이긴 하지,,,근데 감동은 없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관리가 철저해야한다. 자기관리 소홀하면 ....그 인생은 추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당위들이 계속 들어간다는 것.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이런 식.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갖다주는게 아니라 스스로 긍정적인 인생관 지니고 만들어야한다.

사소한 일에 고맙고 기쁨 누릴줄 알아야한다,,,

이런게 다,, 긍정적이란게. 쉽게 얘기하면 즐겁게 생각해야된다라는 거잖아.

실제로는 즐겁지 않은데 다 즐겁게 생각해야하고,, 괴로운데 괴롭지 않다라고 생각해야하고,,

이 책이 군대 추천서에 들어가있는 것도 이런 얘기이니.

괴로워도 즐거워해라!

소소한 즐거움 발견해라이렇게 넘어가는 것과 구별이 없음.

 

내가 생각하는, 내가 느낀 즐거움은 만드는게 아니지. 찾아오는 것이지.

그 찾아온 것을 계속 찾아가는거고. 그게 진짜 즐거움 아닌가.

즐거워야지. 자기관리 철저히 해야지.이렇게해선 최소한 나한텐 해당이 없다.

oo생활에 맞추고 몇시에 일어나 oo가고.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걸 원하는 사람한테만 즐거울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얘기했던 절 회보 관련 물음.

우리는 현재 이대로 완전무결한 존재로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지...

현재 그대로 완전무결하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뿐입니다.”

---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자신을 봐도 그렇고,, 완전무결하지가 않은데,,,??

 

H:

그 글이 뭔 얘기하는지는 알거 같은데..

완전무결이란 말은 '결함'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

우리가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그냥 그거라는거.

우리가 태어나서 알게 모르게 스스로에게 덧씌운 생각들이, 가치관들이 있거든.

고정된 뭔가로 보는,

그게 자기를 괴롭히고 뭔가로 몰아가고 뭔가를 끼워 맞추려고 만드는,

나를 뭔가 계속 부족한 것으로 보는 ㅡ 그 부족하다는 말 자체도 사회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비교하니 생기는.

그냥 그 자체로 있을뿐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얘기처럼 자기관리해야되고 이런게 아니라.

여여하다. 그냥 그대로 있는거야. 이유도 없어,

완전무결,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면 그건 모르겠고.

그냥 있는거지.

완전무결. 무슨 뜻인지는 알아.

우주의 원리 따져보면 신기하고 그 말이 맞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뭐다라고 표현해버리면 불편하다. 뭔가.

완전무결하지 않은 뭔가를 전제하는 느낌이 들잖아,

그런걸 떠나서 그냥 여여한거

그냥 그런거 이유가 없다,,

어둠과 대비되는 빛. 완전무결표현조차 쓸 필요없는. 그냥 있는건데.


언어라는게 있기 때문에 100% 순도 유지하면서 전달되긴 어렵다.

언어는 개념이잖아. 뭔가를 딱 얘기하는게 아니라,

소통위해서 개념화시켜서 얘기,

그 마음에 느낀걸 말을 통해야되니

그걸 개념화시켜야되니, 그 과정에서 순도 떨어질 수밖에

표현어렵고 말이 길어지고 예를 들 수밖에 없는거지.

근데 그렇게 꼬리남기게되면 그 부수적인거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배가 산으로 가고 다른쪽으로 가는.

그게 여여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평안이 오는 것.

그걸 모르잖아 생각을 안 해보니까. 시간도 없고.

이 사회가 시간을 안 주니,,

먹고 살기 바쁘고, 퇴근해서 잠자고 다시 출근하는,,,,,,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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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잘난 아이들.

낮에 일하고 밤에 수업하는 기숙사형 야간 실업고 얘기.


아이들:

왜 찍는지 모르겠어요,

이 학교 왜 찍어요?

발버둥치는 그런 아이들만 있는데 왜 촬영할까.

다른 좋은 학교도 많은데.

외고 이런데 있잖아요.

 

낮에 공장 일하던 학생 :

솔직히 말할까요.

세상이 더럽다고 느껴져요.

이런 일은 알아주지도 않고.

전에 물류회사 다닐 때 임금도 떼어먹고

(야간 다닌다고) 사람들이 무시하고.

 

교사:

기숙사비 밀린 액수가 써있다.

4개월 4십몇만원.

엄마아빠 해줄수 있어? 아니 없어요.

그럼 니가 해결해야지.

그럼 일해야지.

학교다니면서 3년 일하면 너하나 방 구할 돈 모을 수.

그러면 거기서 시작인거야,

 

그래도 속된 말로 지 밥벌이 하는거 같아서. 좋기도 하지만.

저녁에 등교하는 애들 보면.

나이 어린애들이 직장생활하는거 보면 답답해요, 별로 기분 좋지는 않다.

 

아이들 퇴근 후 학교와서 저녁식사.

 

교장:

교육이라는게 별거 있나 애들 돌봐주는 건데,,

대부분 객지생활하는 애들. 부모와 떨어져사는 애들이니까.

애들 대부분 직장 끝나고 와도 밥도 제대로 못 먹으니까.

그래도 아이들이 밥 먹는거 보면 대견해요. 보람도 느끼고,,

 

나레이션: 세상이 화려해질수록 야간학교는 부끄러운 곳이 되갑니다.

 

교사:

(입학정원 다 찼다고 자기 아이한테 거짓말 해달라는 입학상담 부모와 통화)

(학부모들이) 창피한 거죠.

창피한 학교.

보내면 안 되는 학교.

하지만 어쩔 수가 없으니 보내는 학교

 

겉에서 보면 하나도 잘나지 않았죠.

여기 학교입니다.

아버님께 그랬더니 이게 학교야?” 하시더라구요.

 

문학시간: 글쓰기 시간. 회사에서 겪은 부당한 일.

학생: 욕 먹은거.

(낮에 직장에서) 막내라고 청소 설거지 심부름,,,,빡치는 거예요,

 

취업담당교사:

너 홀서빙 안 해봤어? 시켜줬었지.

또 며칠 안 가 그만둘까봐 걱정.

아직 17,

아이들은 일단 졸업이 목표.

 

힘든 직장일을 모든 아이가 잘 견뎌내는건 아니다.

학교 남아있는 미취업생들.

학생: 지난 번에는 그릇 수레 끌다가 와장창 깨졌다.

잘리진 않았다.

 

살아가려면 일해야한다는 걸 알지만 힘이 나질 않습니다.

낮에 교실에서 누워있는 아이들.

 

교사:

아이들 피곤해한다.

인생 자체가 피곤한거지.

너무 피곤한 거야.

몸의 기운 자체가 피곤.

일도 안하고 있는데.

너무 짠해요 마음이,,

며칠 나갔다가 오는 아이들.

마음은 하나하나가 오면 안아주고 싶은데.

 

학교 빠지고 찜질방 PC방 전전하다 오기도 한다.

근신.

적응 못하는 아이들. 교사 회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애들까지 굳이 계속 데리고 가야되나?

열띤 회의.

 

무단결석했던 아이. 청소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애들도 있다.

 

교사:

믿음을 주면 아이들이 바뀌나요?

아이들은요 확 안 바뀌어요.

어른들도 확확 바뀌나요?

어쩌다가 바뀌는 애 있으면 다행인거지.

3년 안에 애들 바꿨다 그런다면 거짓말이다.

그 사람 앞에서만 알랑거리는 것일수.

내 새끼들 집에 있는 애들한테 잘 해줘도 확 안 바뀌는데.

확확 바뀐다는게 거짓말이지.

대신에,

아주 작지만 아주 조금씩 변해간다.

1학년때 선생 나와도 담배 물고 있다가

2학년때 선생 나오면 손의 담배를 숨기고

3학년때 선생 나오면 담배를 끄는.

그 정도 변화는 있는거지

그 정도 변화에 기분이 좋은거지.

 

중학교 때부터 혼자 살아온 학생:

도움 받을데 없었다.

엄마 아빠 지원아래 공부하는 애들 보면 부럽지 않니?

부럽죠 솔직히 아이들한테.

엄마 아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럽죠.

돈이 없어도 반지하 살아도 같이 얘기하며 밥먹는 엄마 아빠가 있는게.

학교가 그리울 시간이 없었다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진짜..

 

선생님은 이 힘든 거 왜 하세요?

교사:

맨처음 여기 왔을 때 전율.

내가 여기서 선생해야겠네 그런 생각가지게 한 학교.

어떨 때 문득 후회 되기도.

나도 어느 정도의 급여 받으면서 나의 삶 꾸려가고 싶다는 생각 들 때도 있지만,

아이들이랑 지내보면 알겠지만,

문득문득 가슴 저리게 하는 것도 있으니까.

사회가 너무 힘들게 하니까.

내가 놓으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

아이들 생각할 때마다 울컥해요.

 

부모가 아니시잖아요.

(내가 부모가 아니라서) 그게 가장 가슴아프다

걔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모가 있잖아요.

 

 

후회는 처음부터했죠. 지금도 후회하죠.

어떤 부분에서는.

후회는 이럴 때.

전 사실은 정말 아이들한테 행복한 좋은 공간 만들어주고 싶은데,

그렇지 않다고 느껴질 때.

아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전 아이들이 정말 좋아요.

 

 

교장:

삶의 과정에서 어디 갈 데가 없어서 떠밀려 오는

이 아이들에 대해서,

교육하시는 분들이나 학자분들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우리 애들이 갈데가 없다.

1617살 애들을 사회에 내보내고

내가 들어오라해서 들어온게 아니라.

사회적 폭력이예요

폭력으로 내몰리는 거죠.

그런 내몰린 애들이 들어옵니다.

별 대안도 없이 쫓겨나고.

 

아침 청소하는 교장. 10년 됐어요.

매일 아침 6시 반에 나오죠.

(애들을 학교에서 재우니까) 걱정되서 나오죠.

 

 

아이들:

이 나이에 식당일하고 하지만.

솔직히 그만두고 싶은데.

난 한시간 4580원 받고 이렇게 산다.

누구한테 무시당해도 기 안 죽는다

보잘 것 없지만 자신한테 떳떳하다.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런 학교가 아니라 열심히 사는 아이들 중의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교사:

(아이들 항상 하는 말이)

전 안 되요.

너 왜 안되냐?

전 안된다고 그랬어요.

부모님도 그랬구요.

전에 선생님들도 그랬구요.

크게 바라지 않는다.

월급 제대로 받으면서 일한 만큼 정당하고 요구하고 살아라.

너희는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고 고유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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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생님들이 훌륭하네.

시급 4천 몇백원? 장난하냐.

완전히 노동착취지.

근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런 애들이) 그냥 사회에서 범죄자가 되지 않고 

자기 노동한 것 월급 제대로 받고 문제 없이 살길 바랄 뿐.

내 딸이 그런 애들과?

절대 안 된다. 내가 딸을 어떻게 키우는데. 

저학력의 남자와 만나서 연애나 결혼?

절대 반대다. 부모 가슴에 못박는거다. (내 딸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데.

상대가 무슨 대단하기를 바라는 (속물적) 기준이 아니라 정말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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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선

카테고리 없음 2012. 10. 22. 21:45

월간 조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07100050&ctcd=E

사람의 죄는 소유와 욕심에서 나와… 이걸 없애자는 게 공동체

원경선의 소원은 간단했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우리 땅을 소중히 여기고, 무공해 농사를 비롯해 미래의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원 원장을 미래와 환경을 생각하는 할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유기농 식품회사 풀무원의 모태가 된 풀무원 농장 설립자인 그의 평생 직업은 농부였다. 그냥 농부가 아니라 생명 농부라고 부르는 것은 국내에서 유기농을 처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사법을 한평생 고수해 온 원 원장은 지난 417일 아흔아홉 살 생일인 백수(白壽)를 맞았다. 이번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통합당 원혜영(元惠榮) 의원 등 25녀와 며느리, 손자, 증손자를 합쳐 37명의 자손을 두고 있다.

원 원장의 건강비결은 현미와 유기 농산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1975년부터 현미식을 시작한 원 원장은 요즘도 세 끼 식사를 유기농 현미 잡곡밥과 채식 위주의 반찬으로 한다. 어릴 때 영양실조로 간디스토마를 심하게 앓아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유기농 현미밥을 먹으면서 이런 증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원경선의 100년 삶은 땅, 생명, 이웃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1914년 출생한 원경선은 평남 중화군의 빈농(貧農) 아들이었다. 아버지(원낙범·元洛範)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김승수·金承水)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밭일을 했으나 가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보통학교를 가까스로 마쳤다. 그나마 도() 장학금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열일곱이 되던 해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러던 어느날, 군청에서 농촌 자력갱생 운동의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영농자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신청한 적도 없는 자금이었다. 알고 보니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 10원 가운데 아껴 쓰고 남은 돈 150전을 학교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감동한 일본인 교장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 같은 전도사가 되기로 했다. 그가 속한 교단은 퀘이커와 비슷한 평신도 독립 교회를 주장하는 형제단(브레들린·Brethren)이었으므로 목사가 없었다. 전도사가 되려면 신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던 만큼 우선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야 했다.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우유 배달을 하고, 낮에는 목장에서 막일을, 밤에는 공부를 했다. 잠은 3시간을 넘지 못했다. 어차피 정신력에 의지해 가는 길이어서 몸은 억지로라도 따라와 주었다. 다만, 생전 처음 하는 영어 공부는 혼자 힘으로 해 낼 수가 없어 학원을 다녔다. 결국 이 도전은 전차에 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석달 만에 좌절됐다.

원경선 부부는 결혼 이듬해인 1939년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떠났다. 아내의 뛰어난 타자 솜씨를 밑천으로 삼아 작은 등사 인쇄소를 차렸다. 두 사람의 성씨를 따 상호를 지원인서사(池元印書社)라고 했다. 금세 직원이 20명이 넘어설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원경선은 부천에 처음으로 가족공동체를 꾸리고 포도를 심었다. 그러나 첫 해 농사를 짓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져 버렸다. 전쟁은 원경선의 인생에 또 한 번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기독교인인 데다 땅도 적지 않은 지주계급이라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재촉했다. 그는 공동체의 노인들과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부천에 남았다.  

한번은 인민군에게 무작정 끌려가 부천 소사읍사무소에 갇혔다. 그들은 원경선에게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고, 그는 종교인이라 당원 자격이 없다고 버텼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원경선을 두들겨 패고 따귀를 때렸다. 그때 고막이 파열되는 바람에 지금도 왼쪽귀를 듣지 못하게 됐다

1·4후퇴 때는 졸지에 마흔의 나이에 국민방위군에 징집돼 제주도 훈련소로 갔다. 부패한 군인들이 쌀과 옷을 빼돌리는 바람에 제주도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19525, 천신만고 끝에 귀가했다. 천행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여섯 살짜리 둘째 아이가 디프테리아로 약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성이 막 멈춘 1955년의 한반도에는 탄피처럼 여기저기 전쟁고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들, 넝마주이들을 데려다 거친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가르쳤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자는 원칙을 세웠다.

농장의 이름은 녹슬고 쓸모없는 인간을 풀무질로 달구고 담금질해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터전이 되자는 의미에서 풀무원이라고 붙였다. 충남 홍성에 풀무농업학교(현 풀무학교)가 있어, 원경선은 그 학교 주옥로 교장에게 우리 공동체 이름에 안성맞춤인데, 그 이름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풀무원 공동체는 사유재산을 아주 예외로만 인정했고, 모든 것을 공동체 소유로 했다.그러다 보니 사소한 먹거리 하나를 두고도 아귀다툼이 벌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 고기 한 점 더 먹이겠다는 싸움 끝에 보따리를 싸 들고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생겨났다.

원경선이 12살 손위의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경, 스물두 살 무렵이었다. 무교회 운동을 벌이던 선생의 주장에 원경선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YMCA에서 있었던 선생의 목요강좌에 자주 들렀다. 

선생은 나중에 무교회주의도 버리고 보다 더 자유로운 퀘이커교도를 선택했다.  원경선은 공동체를 출범시킨 뒤 땅에서 바른 생활을 일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갈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 선생과 원경선은 농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선생은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세우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그런 선생은 농사이야기를 하기 위해 원경선이 운영하던 공동체를 찾아 부천과 양주를 자주 들렀고, 원경선도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경선은 함 선생의 글쎄의 의미가 만사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어서 

함 선생이 그만큼 생각이 넓고 크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함 선생은 농사와 자유로운 신앙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원경선과 통하는 면이 많았다. 그러나 원경선은 함 선생이 농사를 통해 바른 일꾼을 길러 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여러 모로 격려해 준 스승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원경선은 유기농업에 관한 어떤 지식도 없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증산(增産)만이 농업의 최고 덕목이던 시절이었다. 농촌진흥원 같은 기관의 지도에 따라, 통일벼 계통의 다수확 품종이 권장되고 있을 때였다. 밭은 밭대로 농약과 화학비료의 즉각적이고도 환상적인 효능에 사로잡힌 농민들에 의해 약 범벅이 되어 갔다. 

많을 때는 60~70명에 이르는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었던 풀무원 농장도 시절에 맞게, 그리고 현실이 절실해서 다수확을 제일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를 멀리할 아무런 이유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원경선은 고다니를 부천으로 초대했다. 그가 한밤의 회동을 끝내고 돌아온 그 이듬해 고다니가 부천에 왔다. 고다니는 이렇게 외쳤다. 

일본은 패전 후 그저 식량증산을 위해 무분별하게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사용해 왔습니다. 비록 생산량 증가에는 성공했지만, 이러한 농법은 결국 모두가 자멸하는 길일 뿐입니다. 제발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아 주십시오.”   

원경선은 그 내용 중에서 당장 자신이 실천 가능한 영역을 찾아 냈다. 닭이나 소, 돼지가 사람 하나에게 필요한 열량을 낼 만한 고기를 생산하려면 사람 넷에게 필요한 열량을 낼 만한 곡물을 먹어야 한다는 분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풀무원 농장의 양계는 그때 그만두었다. 대신, 주곡인 쌀 생산의 중요성과 생태와 환경에 순응하는 유기농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원경선은 부천에서 6·25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거두자는 가난구제라는 목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러나 1976년 양주로 옮기면서 부천의 바르게 사는 삶보다 나누는 삶에 힘을 쏟았다. 원경선은 사람의 죄는 소유와 욕심에서 온다이걸 없애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자는 게 공동체라고 역설했다

그는 농장을 꾸려 나가기 위해 만든 한삶회란 재단에 자기 재산부터 털어 넣었다.

마침내 한국 최초의 유기농 생산자 단체인 정농회가 19761월 부천 풀무원 농장에서 조촐하게 결성됐다. 초대 회장은 오재길씨가 맡았다. “이런 농사는 간접 살인이다라는 원경선의 극적인 이 한마디가 농부들을 정농회로 끌어들였다. 정농회가 한국의 대표적인 유기농 운동 단체로 성장하기까지 원경선은 전국의 농촌을 누비며 농민들을 만났다. 

당시 농촌사회는 가톨릭농민회나 기독농민회 등 농민 권리 찾기 단체들을 두고 우리도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원경선은 권리 찾기 데모는 그쪽에 맡겨 두고 우리는 생명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정리했다. 

제초제 대신에 내 손으로 김매고, 농약을 안 쓰니까 내 손으로 벌레 잡고, 화학비료를 안 쓰니까 내 손으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새벽에 농장에 나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었죠. 가난하고 일손까지 부족한 우리 농촌에서 결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자고 했으므로 나부터 나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양주에서는 양계와 양돈을 포기하고 모두 채소와 벼농사에 집중했다. 그러나 첫해는 참혹했다

모진 병충해가 약 안 친 채소밭을 걸레로 만들고, 벼 이삭을 반 넘어 훑고 지나가 쭉정이만 남겼다. 농약을 뿌리지 않아 채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도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의 살 만한 집이 몇백만 원 하던 시절에 1000만원어치쯤 손실을 보았다. 풀무원 농장의 형편이 그토록 딱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기농이 뭐 하자는 짓이냐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정농회를 탈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때마다 원경선은 고다니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유기농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장미다발을 껴안는 것이어서 장미를 껴안을 때마다 가시가 온몸을 찌르게 됩니다. 그 아픔을 모두 견뎌 내야 비로소 장미를 껴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도 원경선은 계속했다.오로지 사람을 살리자고 이런 농사를 시작했는데 땅이 나를 망하게 할 턱은 없다는 생각만이 의지였다.

삼 년째부터 땅이 조심스레 화답하기 시작했다.  

1g5000~1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고, 이들을 살리는 것이 유기농의 관건이라는 것도 터득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미생물이 죽지만,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다고 미생물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미생물도 생명체라 영양분을 먹어야 산다. 먹이는 다름 아닌 퇴비 같은 유기질 비료였다. 원경선은 해낸 것이다. 3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은 것이다. 

1980년대 전후로 매스컴이 유기농의 성공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서울 강남의 부인들이 풀무원의 유기농 소식을 듣고 양주까지 비포장 도로를 달려 채소를 사러 오는 일이 생겼다. ‘유기농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여서 그저 무공해라고들 했다. 

 유기농에 대해 정부는 무관심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유기농에 대한 입장은 크게 바뀌었다. 김성훈(金成勳) 농림부 장관은 농림부 내에 친환경농업과를 만들고 정농회를 비롯한 유기농 단체들을 지원했다

원경선은 1990년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원혜영 의원은 2010년 발간한 아버지, 참 좋았다에서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란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농부로 살고자 한 것,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는 것, 그것을 교육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것, 기아를 예측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 공동체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실천한 것에서 아버지와 피에르 라비는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했다.

그는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오빠나 여동생이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서 공동체 생활이란 게 이상은 좋지만 얼마나 엉터리인지 너무 실감나게 겪었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혜덕씨는 그 많은 공동체 식구들의 밥과 빨래를 해 대시면서 아버지의 말에 오로지 라는 말밖에 하지 않으신 어머니였다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자식이고, 이 사람들을 돌보는 게 내 달란트(talent)’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다.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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