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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

카테고리 없음 2012. 10. 21. 20:11

월간조선: 

日帝下 조선인 特高경찰관들의 죄와 벌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411100021&ctcd=&cpage=1

http://badoc.egloos.com/1161409

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2만6677명의 日帝 경찰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약 40%인 1만619명이었다. 직급별로는 지금의 치안감급에 해당하는 道 경찰부장에 조선인이 1명, 경시급(지금의 총경)에 21명(日人 48명), 경부급(지금의 경정)에 105명(日人 433명), 경부보급(지금의 경감)에 220명(日人 790명)이었다. 나머지 조선인 경찰관 1만272명(日人 1만4775명)은 非간부급인 순사부장과 순사였다.   

  尹鍾華(윤종화·당시 황해도 경찰부장)는 일제 통치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道 경찰부장이었다. 충남 출신인 尹씨는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경시로 출발했다. 그는 1944년에 경찰부장이 됐다.   
  광복 직후 한국인으로서 日帝 경찰의 경시(지금의 총경급)까지 올라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확인되는 이는 다음과 같다. 

  
田鳳德(전봉덕·당시 경기도 보안과장, 광복 뒤 육군헌병사령관),

李益興(이익흥·당시 평북 박천서장, 광복 뒤 내무장관), 

尹宇景(윤우경·당시 황해도 송화서장, 광복 뒤 치안국장), 

孫錫度(손석도·당시 서울 성동서장, 광복 뒤 중부서장),

崔燕(최연·당시 경기도 형사과장, 광복 뒤 수도경찰청 고문)

盧德述(노덕술·당시 평남 보안과장, 광복 뒤 수도청 수사과장과 헌병중령),

崔慶進(최경진·당시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광복 뒤 수도청 차장), 

盧朱鳳(노주봉·당시 전남도 경시, 군정 때 전남 경찰부장) 
  
  1946년 1월12일자로 美 군정청 경무국은 경무부로, 각 課(과)는 局(국)으로 승격되었다. 趙炳玉(조병옥) 경무부장과 張澤相(장택상) 수도청장(서울시경국장에 해당)의 親日경찰 중용 소신이 드러난 것은 그 직후에 있었던 서울시내 8개 경찰서장 임명이었다.  서울시내의 8개 경찰서장 자리는, 반탁운동 때 8개 경찰서 서장들이 동조하여 해임됨으로써 비어 있었다. 중부서장으로 발령된 李九範(이구범)은 일제 때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로 있으면서 張澤相의 편의를 보아준 적이 있는 이였다. 
  
  용산시장으로 임명된 金亨鎭(김형진)은 일제 경부보 출신이었다. 광복 때 평북 박천서장이었던 李益興은 광복 뒤 남쪽으로 피신했는데, 동대문 서장으로 임명됐다. 일제 때 평남 영원서장을 지낸 李虎雨(이호우)는 마포서장으로, 경기도 경철부의 경부였던 尹箕炳은 수원경찰서장에서 서대문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수도청은 親日派 일색으로 되었다. 
  
  한편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는 광복 때 평남경찰부 보안과장이던 盧德述을 임명했다. 
  
  특별고등경찰(特高경찰·독립운동 및 좌익사범 전담부서) 고문경찰관의 대명사처럼 된 盧德述은 광복 직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다가 공산세력에게 붙들렸다. 그는 몇 달간 구금되어 있다가 1945년 말에 풀려나 남쪽으로 왔다. 
  
  親日 경찰관들을 趙炳玉 군정청 경무부장과 張澤相 수도청장에게 주로 소개한 이는 경무부 차장으로 趙炳玉 부장을 보좌하던 崔慶進과 수도청 고문으로서 늘 張澤相 청장 곁에 있던 崔燕이었다. 崔慶進은 평남 보안과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고(광복 당시엔 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崔燕은 북한에서 무장 독립군을 붙드는 데 이름을 날린 최고참 고등경찰관(독립운동 탄압 담당)이었다

  
  盧德述 수사과장은 1946년 4월6일 宋鎭禹(송진우) 살해범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게 됐다. 

  
 反民特委는 特高 출신들을 집중 수사
  
  1948년 9월7일 국회는 「反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와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했고,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고등관 3등급 이상 5훈 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와 헌병·헌병보·고등경찰의 職(직)에 있었던 자는 이 법의 공소시효(2년)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으며, 특별검찰부(특검)를 두는 등 서슬이 퍼런 법이었다. 이 법이 가장 중요한 표적으로 삼은 것은 일본인 경찰의 下手人으로서 동족을 탄압했던 特高경찰과 헌병 출신들이었다. 
  

  당시 수도청 사찰과 부과장 洪宅熹(홍택희)의 증언에 따르면 수도청 사찰과엔 약 60명의 형사가 있었고, 각 경찰서 사찰계에는 20~30명의 형사들이 있었는데,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찰 사찰과는 정보·공안기관의 기능을 겸한 권력 센터였다. 
  
  핵심 중의 핵심 자리인 수도청 사찰과장 崔雲霞는 일제 때 총독부 경무국과 종로경찰서 등에서 줄곧 고등계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자리에 있었다. 광복 때는 경부로서 종로서 고등계 주임이었다. 
  
  反民特委(반민특위)는 1949년 1월8일부터 反民法 해당자들의 검거에 착수했다. 1949년 1월31일까지 반민특위에 체포 구속된 사람은 21명. 金悳基, 李聖根, 盧德述, 河判洛, 李源甫, 劉徹, 노기주, 金泰錫, 崔燕 등 고등경찰 및 헌병 출신들이 被체포자들의 主流를 이루었다. 
      
 特高 출신들의 면면들
  
  일제 때 경남도 보안과장이었던 노기주는 광복 뒤에도 경남도 경찰부장을 지냈고 체포 당시에는 부산 영도의 조선경질탄도기 회사의 관리인이었다. 
  
  金悳基(김덕기·당시 60세)는 평안북도 고등과장으로 있을 때 吳東振(오동진)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 獄死(옥사)시킨 혐의로 구속되었다. 황해도 형사과장이었던 金克一(김극일·당시 62세)도 같은 날 구속됐다.

李聖根은 황해도 해주경찰서 순경으로 시작하여 평북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고 知事(지사)로 영전했으며, 광복 때는 매일신보 사장이었다. 

그는 나중에 反民특재 공판에서 『평북 고등과장으로 6년간 재직하는 동안 매년 약 100건(연루자 약 300명)의 사상사건을 취급했으며 만주 안동에서 독립단 간부 12명을 체포, 압송하여 처형케 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엔 上海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로 잠입, 치안을 교란시키려는 자는 내란죄로 처단했다』고 실토했다. 
  
  金泰錫(김태석)의 공소장은 일제 때의 고등형사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기소장에 따르면 金泰錫은 1912년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출발, 함북 웅기경찰서, 평남 광양만 경찰서, 평양경찰서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로 轉職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게 되었다. 

金泰錫은 1919년 9월17일 서울역전에서 사이토 신임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강우규) 義士를 체포, 결국 사형을 받도록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許炯(허형) 등 애국투사들도 그가 검거, 투옥시켰다.   
그는 이듬해 7월20일엔 밀정 金珍奎(김진규)를 이용, 밀양폭탄사건의 주동자인 李成宰(이성재), 尹小龍(윤소룡) 등을 체포하거나 혹독하게 고문하여 사건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또 1921년 10월엔 조선의용단 사건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1923金泰錫은 한국인으로는 최고 경찰직인 경시(지금의 총경급)로 승진, 경기도경 형사과장으로 임명됐다가 곧 군수로 나갔다. 연천·부천군수 등을 거쳐 1938년엔 경남도 산업부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지원병 募兵(모병) 시험관을 겸무하면서 청년 25명을 출병케 했다고 한다. 


정권의 走狗 역할 계속한 特高 출신들 

親日 경찰관들 가운데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 할 이들은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절도·강도 등 형사 출신들은 우리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일반 형사범들을 잡아넣었다고 변명할 수 있었으나 오로지 동족을 감시 탄압하는 것이 직무였던 고등계 형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고등계 형사로서의 존재 그 자체로써 이미 민족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광복 뒤에 경찰의 핵심부를 장악, 反民特委의 활동 때까지도 온존하고 있었던 것이 이들이었다. 反民特委日帝 고등계 출신인 수도경찰청 전 수사과장 盧德述을 반민법 해당자 및 중부서 고문치사 사건 피의자로 체포했다. 親日경찰의 간판격이면서 군정 경찰에서는 좌익색출에 공이 많았던 盧德述의 체포는 反民特委親日경찰의 대결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日帝의 조선인 탄압에 심부름꾼으로 일했던 特高 출신들은 건국시기엔 李承晩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좌익소탕에 기여했다. 위대한 독립투사였던 李承晩 대통령은 反民特委反共이 최우선 과제인 시대 상황을 모르고 반공기술자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룬다고 불만이 컸다

이 뜻을 알아차린 경찰은 反民特委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공작에 앞장섰다.


日帝 特高경찰 및 헌병 출신들은 李承晩 정부 시절, 경찰 사찰과와 의 특무대에 주로 포진하여 정치공작에도 복무했다.

 5·16 뒤에는 모씨 등 特高 출신자들이 정보부로 들어가 그 특기를 발휘했다

이들은 건국 및 護國(호국)의 시대에 좌익검거에 공을 세웠으나 정권의 走狗(주구) 역할을 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한계로 해서 무리한 수사로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때로는 이들이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 운동가들을 조사하는 사태도 벌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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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전봉덕(田鳳德, 일본식 이름: 田中鳳德[1]1910년 12월 12일 ~ 1998년 5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간부이며 대한민국의 군인, 변호사이다

전봉덕은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다.[2]

사상범을 다루는 보안과에 근무했지만 미군정의 일제 경찰 경력자 우대 방침에 따라 경기도 경찰부의 보안과장으로 계속 근무했으며, 장택상의 비호를 받으며 미군정 경무부의 공안과장(1946), 경찰전문학교 부교장(1947) 등으로 승진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정과 함께 친일 경찰에 대한 탄압이 예상되자,

친일파 조직인 88 구락부의 같은 회원이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도움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제1기)하고 헌병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헌병 조직은 친일 경찰들의 도피처가 되었으며, 전봉덕은 자신을 체포하려했던 반민특위의 소장파 의원들이 연루된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헌병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본부장에 올라 이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1949년에는 대통령 이승만의 최대 정적인 김구가 자택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때 전봉덕은 안두희를 보호하면서 사건을 축소하고 배후를 은폐하는 쪽으로 수사를 마무리해버렸다. 이승만이 사건 발생 보고를 듣자마자 당일로 그가 수사를 담당할 수 있도록 헌병사령관으로 승진시킨 것을 놓고,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전봉덕은 이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법조계의 원로로 활동하였고, 법제사 분야의 저술 활동을 주로 벌였다. 1973년에는 한국법사학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맡았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 건너가 생활했다.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문인 전혜린은 전봉덕의 1남 7녀 중 맏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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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흥(李益興, 1905년 3월 10일 평안북도 ~ 1993년11월 27일)은 일제시대때, 친일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훗날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정권에 아부하여 고급경찰간부로 활동하였고 사사오입 개헌의 공로로 대한민국 제13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과 졸업한 후 총독부 경찰관이 되어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평북박천군 경찰서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는 치안국장, 경기도 지사등을 거쳐내무부 장관 직에 임명된다. 내무부 장관 시절 그는 야당(민주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특히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주모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유명하다. 1960년 4.19 혁명 후 체포되었지만, 이듬해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석방되었다.

199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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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도(孫錫度, 일본식 이름: 孫田宗明, 1910년 1월 14일 ~ ?)는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경찰 간부이며,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조선총독부 경부에 임명되어 경찰 간부로 근무했다.

전라남도 경찰부 경무과에서 근무하면서 전남경찰교습소 교관을 겸하다가, 전남 함평군 군수가 되어 관계로 잠시 이동했다. 이후 1940년대에 다시 경찰로 돌아와 도경시로 승진하여 황해도 경찰부 보안과장을 지냈다. 1943년을 기준으로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에 경시 계급에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1] 종전을 1주일 앞두고 경기도경찰부 회의실에서 간부 회의가 열렸을 때, 조선인 경찰로는 형사과장 최연, 보안과장 전봉덕, 성동서장 손석도 등 최고 간부만이 참석했다.[2] 이 자리에서는 일본 제국의 항복이 멀지 않았다는 고급 정보가 공유되었다.

미군정 지역에 남아 서울중부경찰서장을 지냈고, 이후 변호사를 개업하고 법조인으로 활동했다1965년에 성곡언론문화재단이 설립될 때 《조선일보》 주필인 최석채와 함께 준비 작업을 맡았다.[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경시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와 경찰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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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崔燕, 일본식 이름: 高山淸只, 1897년 3월 6일 ~ 1958년 11월 14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로, 본명은최령(崔鈴)이며 본적은 함경남도 함흥시 복부동이다.

1918년 함흥부의 함흥경찰서 순사로서 경찰 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말단 직책에서 출발하였으나 1922년 경부보 시험에 합격한 뒤 이후 함경도 지방 곳곳을 돌면서 경력을 쌓아 1942년 조선인으로서는 경찰 내 최고위 계급인 경시(警視)에 올랐다. 이후 황해도 보안과장을 거쳐 경기도 형사과장을 지내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그는 고등계 형사로서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일을 담당했으며특히 혜산 경찰서에 근무할 때 1938년 혜산 사건으로 박달을 비롯한 3백여 명의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악명이 높았다. 이 사건은 독립 운동이 활발한 만주 지역이나 중국공산당과 연계를 갖고 있던 함경도 지역의 독립 운동 국내 거점을 분쇄하려는 대규모 조직 사건으로 김일성과도 관련이 깊다. 최연은 이 혜산 사건에서 공을 세워 경찰 공로기장 훈장을 수여받았다.

광복 후 경찰 조직은 미군정의 전직 일제 경찰 등용 방침으로 친일 경찰들이 그대로 현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연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무과장으로서 경찰부장에 차례로 임명된 미군정 장교와 장택상을 보좌하며 인사에 개입하였다. 

그는 함경도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기에, 북조선에서의 친일 추궁과 체포, 재판을 피해 월남한 고등계 출신의 친일 경찰들을 대거 추천하여 이들을 남한의 경찰 조직 내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광복 당시 최연은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1]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이후 친일 경찰이 체포될 때 최연 역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된 뒤 공민권 10년 정지의 가벼운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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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진(崔慶進, 1908년 ~ ? ,創氏名:江東慶進)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경찰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공무원이었다.

함경남도 함흥부 출생이다. 함흥상업하교・부산상업학교(3년편입)에서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유학중이던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같은 해에 합격하였다. 또한 법학사(法學士)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함경남도 경부(警部), 평안남도 강동군수,평안남도 경시(警視)/경찰부 보안과장,朝鮮總督府事務官(學務局錬成課)등 경찰 공무원을 역임하였다.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1]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그대로 경찰로 등용되어 경찰국장 대리, 경무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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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봉(盧周鳳, 일본식 이름: 豊川守弘, 1900년 7월 25일 ~ 1945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로, 본명은 노주현(盧周鉉)이며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생으로, 전남 지역에서 발생한 광주학생운동 수사를 담당한 경찰이었다.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경찰관 시험에 합격하여 1920년대부터 전남 경찰부 보안과에서 일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남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을 색출, 수사, 고문하면서 공을 쌓아 경시 계급에 올랐다.

노주봉이 맡아 수사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29년의 광주 학생 운동, 1932년 김호선, 정동화, 윤승현 등이 검거된전남노농협의회 사건, 1934년 전남노농협의회를 재건하려다 김홍배, 황동윤, 이기홍, 오문현 등이 연루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1942년 기한도, 윤봉현, 강한수 등 학생들이 옥사한 무등회 사건(제2차 광주 학생 운동) 등이 있다.

노주봉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하기 전인 1945년 사망하여 공식 기록으로는 그의 활동상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들 사건에 연루되어 그에게 취조를 당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문 과정에서 그 잔인성이 극에 달했으며 사건의 조작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노주봉은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1]

일제가 패망해 물러간 후에도 미군정에 의해 전라남도 경찰부장에 임명되면서 친일 전력이 있는 경찰들을 등용하고건국준비위원회와 여타 자치적인 지역 조직을 분쇄하는 일을 했다. 일제하에서 고문 경찰로 악명을 떨치던 이들이 광복 후까지 득세하는데 대하여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던 중, 노주봉의 부하인 강홍섭이 시민들에게 구타당해 살해되었고, 그 역시 광주에서 김영일, 정판국, 김이현에 의해 암살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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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기(金悳基, 1890년 ~ 1950년?)는 일제 강점기의 고등계 경찰 출신 관료이다.

강원도 출생으로, 16년 동안 평안북도 경찰부의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하면서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독립 운동을 탄압하여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기소되었고, 최초의 사형 선고를 받은 바 있다.


김덕기가 체포, 송치한 사상범이 1천여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는 광복군총영 총영장을 지낸 오동진

 의성단 단장을 역임한 편강렬

참의부의 장창헌

'일목장군' 이진무

정의부의 김형출 등 유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장창헌과 김형출은 체포하면서 곧바로 직접 사살해 버렸으며, 

이진무는 사형 집행, 

오동진은 옥사, 

편강렬은 옥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 중 사망했다.


1923년 의열단이 현직 경찰인 황옥과 함께 계획한 대형 테러 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써 경찰 최고의 훈장인 경찰 공로기장을 받는 등 공을 인정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관료로 중용되어 1942년 평안북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1943년에는 농상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 후 소군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친일 인사 탄압을 피해 월남해 있다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고, 공판을 통해 7월 1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수감되어 있던 중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는 과정에서 이듬해 감형을 받아 풀려났다.

1950년 한국 전쟁 직전에 사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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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盧德述, 일본식 이름: 松浦鴻(마쓰우라 히로), 1899년 6월 1일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악질 친일 경찰로 널리 알려졌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일제 강점기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개성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훗카이도에서 취직을 위해 머물렀다.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추학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양주경찰서와 개성경찰서 경부로 재직 당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시국좌담회에 참석하고 지도하는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 총독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1941년 3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그해 6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으로 근무했다.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6월 전시체제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이외에 징병, 운송, 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되자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에서는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이사를 지냈다.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협력했다.


광복 이후

광복 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해방이후 극우 반공주의 활동 및 경찰 활동지내면서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라는 찬사를 얻기까지한다.

1947년 3월에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체포하고,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뺨을 때리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 

의열단출신이자, 김원봉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석헌은 김원봉이 이때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하였다.[1]

김원봉은 붙잡혀 갈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다. 이어서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한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했다.

의열단 동지 유석헌의 회고 증언내용中..

테러의 위협을 받던 김원봉은 결국 1948년 4월 19일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때 김구김규식과 함께 북조선으로 넘어간 뒤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월북 인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2]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수도경찰청 부청장의 신원보증으로 일시 석방되자 도주했다. 

도주 중이던 1948년 10월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등과 함께 친일파 처리에 적극적이던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인 김상덕,김상돈,권승렬,노일환,김응진,곽상훈,김병로,김장렬,오택관등을 비롯해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의원 지청천등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

1949년 1월 24일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이후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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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1년05월22일 제360호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에서 “저놈 잡아라”까지 고문과 은폐조작의 뿌리깊은 계보


사진/ ‘고문기술자’이근안과 그를 총애했던 박처원 전 치안감. 일제시대 악질 친일고등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왼쪽부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이냐?

친일잔재나 친일파 청산을 이야기할 때면 늘 받는 질문 중 하나가 해방된 지 60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이냐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꼭 친일파를 비호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정말 순수하게, 또는 단순하게 왜 과거에만 얽매여야 하느냐는 의문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친일잔재와 친일파의 문제는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해방 뒤 56년, 이 기간은 물리적으로 친일파들이 거의 다 죽거나 최소한 현역에서 은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잔재와 친일파의 문제는 과거사가 아닌 현실의 문제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정호용의 개그 “사람을 어떻게 때리냐”


사진/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라고 지시한 국무회의록 사본.


독자들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박종철군이 희생되었을 때 경찰은 처음 고문이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때 사건을 발표하면서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한 말,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역사에 남는 명언이 되었다. 사건 수습을 위해 새로이 내무장관이 된 정호용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말 역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학살 당시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말로 고문의 진상이 덮일 수는 없었다. 당시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자 경찰은 의사를 불러왔고, 그 의사 선생님은 기자들에게 사건현장에 물이 홍건했다고 경찰 입장에서 볼 때 정말 눈치없이 이야기해버린 것이다. 물고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발표하였다. 두명의 고문경관을 검찰로 송치할 때 경찰은 놀라운 동료애를 발휘했다. 똑같은 옷을 입힌 경관 여러 명을 동원하여 누가 범인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1987년 5월18일 세상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다. 광주의거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박처원이라는 이름은 1999년 11월 다시 화제의 초점이 되었다. ‘고문기술자’라는 희한한 별명을 가진 이근안의 도피를 지시하고 카지노의 대부 전낙원으로부터 ‘경찰발전기금’으로 10억원을 받아내 이근안에게 거액의 도피자금을 마련해준 사람 역시 박처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신문은 1947년 스무살의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박처원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으로 물러날 때까지 주변에 이른바 박처원사단을 형성했으며, 대공조직과 부하들간의 의리를 남달리 강조한 그가 고문에 의거한 대공수사에서 남다른 활동을 벌인 이근안을 총애했다고 보도했다.


48년 박성근 고문치사사건과 노덕술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경찰의 고문이 문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않고 출범한 대한민국 경찰의 탄생에서 고문은 어쩌면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이 있기 40년 전인 1948년에 이 사건과 너무나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사건의 주역은 악질 친일고등경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노덕술(盧德述)이었다. 

1948년 1월24일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박성근(朴聖根, 일명 임화)이라는 25살의 청년이 검거되었는데, 수도경찰청에서 노덕술의 지휘하에 그를 고문하다가 1월29일 오전 3시에 그를 죽게 한 것이다.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노덕술은 직접 곤봉을 들어 박성근의 머리를 무수히 난타했으며, 부하인 김재곤, 박사일 등을 시켜 실신 지경에 빠진 박성근을 3시간에 걸쳐 물고문하게 했다고 한다. 자기 조직의 우두머리를 죽이려 한 자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에서 고문을 행했지만, 정작 피의자가 죽자 노덕술 등은 무척 당황했다. 

이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2층에 있던 취조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저놈 잡아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박성근이 감시소홀을 틈타 도주한 것처럼 꾸미고는 사체를 한강으로 가져가 얼음구멍에 처넣었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에 비해 훨씬 세련된 조작극이 시작된 것이다. 

노덕술은 이 사건의 전말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보고했는데, <동아일보> 1948년 8월27일치에 의하면 장택상은 오히려 노덕술 이하 이 사건을 담당한 14명에게 “그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공로를 찬양하여 2월5일 최고 2만원에서 5천원까지 특별상여금을 주었다”고 한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이 뒤에 폭로된 것처럼 이 사건의 진상도 약 6개월 뒤인 1948년 7월 하순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군정 산하의 경찰조직으로는 조병옥(趙炳玉)이 이끄는 군정 직속의 경무부와 장택상을 수반으로 하는 수도경찰청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단독정부의 수립을 앞두고 조병옥과 장택상, 그리고 그들 휘하의 두 조직간에는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경찰 중 일부 인사는 민족적 입장에서 친일경찰들이 새 정부의 경찰에서 요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런 입장도 박성근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이 폭로되는 데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성근 사건이 뒤늦게 폭로되자 당시 수도경찰청의 안살림을 담당하는 관방장으로 있던 노덕술은 1948년 7월24일 경무부 수사국에 구속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金泰日)은 경무부를 방문하여 사무상 필요 때문에 노덕술에 문의할 일이 있으니 피의자의 신병을 잠시 인도해달라고 요청하여 노덕술을 데리고 간 뒤 노덕술이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수도경찰청이 조직적으로 노덕술을 빼돌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무부는 26일 노덕술을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이에 대해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은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경무부 수사국이 발표한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의 진상은 “사실무근이며 완전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경무부는 김태일 부청장이 노덕술을 빼돌린 것은 민심을 현혹시키고 경찰질서를 문란시킨 것이라며 그에게 정직처분을 내리고 그를 사문위원회에 회부하는 한편, 이만종(李萬鍾) 수사국 부국장의 명의로 담화를 발표하여 김태일의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했다. 이 담화에서 이만종은 김태일이 노덕술이 체포된 뒤 수도청을 대표하여 수사국에 와서 “열성 끝에 치사한 것인 만큼 만일 사건을 취급한다면 수도청이 전복될 우려가 있으니 노덕술 이하 관계자를 정치적으로 관대히 해결해달라”고 간청한 사실도 밝혔다. 

이 귀에 익은 논리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ㆍ김근태씨 고문사건ㆍ박종철군 사건 등 주요 고문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 수뇌부가 대공경찰의 사기 운운하던 것의 원형이 된다.


친일파 처단 주장하면 공산당?

노덕술 사건이 경찰 내에서 친일경찰 및 그 비호세력과 민족적 양심을 지키려는 세력간의 대결구도로 발전하려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는 이만종 부국장의 담화가 나간 다음날 노덕술을 빼돌린 김태일에 대한 정직처분을 취소하고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사문위원회도 취소했다. 

그리고 노덕술을 체포했던 수사국장 조병계(趙炳契)와 부국장 이만종에게 사표를 강요했다. 이들은 8월10일 발표한 사임 성명에서 “금번 조각의 인물구성을 볼 때 우리의 양심을 살리기에는 너무나 환경과 조건이 불리하다”면서 “전일 수사국에서 적발한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에 있어 군정의 책임자도 아닌 자가 불필요한 간섭과 제한을 가함으로써 사건 취급상 중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노덕술의 구명에 앞장선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尹致暎)이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장관에 임명된 것을 두고 “직접 권한이 없는 군정에도 간섭함으로써 부패분자의 구명운동에 동분서주하였거늘 하물며 자기 권한하에 있는 신정부에 있어서는 가히 추측할 수 있다”며 자신들이 왜 물러날 수밖에 없는가를 밝혔다. 

일찍이 경찰 내에서 친일경찰의 척결을 주장하다가 파면당한 최능진(崔能鎭)의 사례와 함께 우리 경찰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찰이 이 지경이 되고 있을 때 달아난 노덕술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이근안이 자기 집 골방에 숨어지내고 박노항이 아파트를 얻어 숨어 지낸 것에 비해 노덕술의 도피 아닌 도피행각은 너무나 화려했다. 노덕술의 은신처는 다름아닌 수도경찰청 청사였다

그는 이렇게 “숨어”(!) 있으면서 무장경관의 호위 속에 경찰관용차를 타고 상관이었던 외무장관 장택상의 집과 자신을 비호해주는 내무장관 윤치영의 집 등 현직 장관의 집에 수시로 드나드는 등 화려한 외출을 즐겼다. 

노덕술이 도피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 외출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큰 오산이다. 노덕술은 경찰 내에 득시글거리던 또다른 노덕술들과 함께 일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8년 7월 제헌국회가 개원하자 비록 이남만의 단독선거에 의한 반쪼가리 국회였지만, 국회는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의 처리를 서둘렀다.


반민법 제정의 열기가 뜨겁던 8월27일 국회에는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공산당”이라는 내용을 담은 ‘애국청년’들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반민법은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와 이를 지휘한 자는 최고 사형, 그리고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그러나 친일고등경찰들이 보기에 너무나 스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특위는 과거 신간회 활동을 했던 제헌의원 겸 특위조사위원 김명동(金明東)의 책임 아래 노덕술 체포대를 구성했다. 노덕술 체포대는 노덕술이 애첩인 관훈동의 기생 김화옥의 집에 드나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화옥의 집에 들이닥쳐 노덕술이 당시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李斗喆)의 효창동 집에 은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체포대는 곧바로 이두철의 집을 급습하여 노덕술을 검거했다. 박성근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난 지 꼭 1년 만인 1949년 1월24일의 일이었다. 체포 당시 노덕술은 4명의 호위경관을 거느리고 6정의 권총과 34만여원의 거액을 지니고 있었다.


실패로 끝난 친일파의 조작사살음모


사진/ 99년11월 체포되어 검찰로 송차되는 이근안.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않고 출범한 대한민국 경찰의 탄생에서 고문은 어쩌면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다.(이정용 기자)


노덕술이 체포된 다음날 세상은 다시 한번 놀랐다. 

백민태(白民泰)라는 테러리스트가 서울지검을 찾아와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노덕술과 또다른 노덕술들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난수(崔蘭洙),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洪宅喜), 중부서장 박경림(朴京林) 등이 반민특위 간부 등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하려 해 사살했다고 위장하려 한 암살음모를 고백하면서 이들로부터 받은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암살대상자 명단을 제출한 것이다. 백민태는 바로 이들이 선택한 하수인이었다. 

그런데 백민태는 항일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테러리스트였기에 백민태를 하수인으로 고른 것은 이들 암살모의자들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암살음모는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화된 1948년 10월 하순에 시작되었다. 

뒤에 반민법 위반으로 구속된 친일파 홍찬(현재 스카라극장인 약초극장 사장)의 집에서 노덕술, 최란수, 홍택희, 박경림 등이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의원들을 암살하기로 모의하였고, 이후의 실무는 최란수와 홍택희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 암살음모는 백민태의 고발로 미수로 돌아갔지만,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국회의원을 제거하려는 친일파의 끈질긴 공작은 마침내 1949년 5월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실현되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이승만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재직시 직접 그를 이화장으로 불러 “자네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을 뻗고 잔다”고 격려한 이승만은 노덕술이 검거되고 얼마 뒤인 1949년 2월12일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1949년 6월의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과 해산,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이 어떤 분위기하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노덕술은 반민특위 습격이 있기 직전인 1949년 5월29일에 열린 재판에서 암살모의 사건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아 풀려났고, 이듬해까지 계속된 박성근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 재판에서도 역시 같은 이유로 무죄방면되었다. 그는 비록 무죄로 풀려났으나 경찰에 복귀하기는 힘들었다.

 노덕술은 군으로 무대를 옮겨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가 창설한 이른바 노덕술 사단은 한국 대공경찰의 모태가 되었고, 그 사단의 막내가 바로 뒷날 자기 사단을 만들며 대공경찰의 대부가 된 박처원, 남영동을 만들고 고문은폐조작의 배후에 서서 고문경관들에게 도피자금과 위로금을 전한 박처원이었다.


똑같은 논리, 똑같은 수법…

역사는 반복되는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으로서 참 답하기 싫은 질문이지만, “저놈 잡아라”에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에 이르는 고문과 은폐조작의 뿌리깊은 계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친일잔재 청산이나 민주화의 염원이 빨갱이들의 주장이 되는 현실, 그리고 고문경관을 싸고 도는 경찰들의 눈물어린 동료애 앞에서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하는가? 

종철이 아버님 말씀처럼 “아무 할말이 없데이…”다. 노덕술은 가고, 박처원도 가고, 이근안도 사라진 마당, 그러나 그들이 남긴 씨는 아직도 이 땅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그들과 똑같은 논리, 똑같은 수법으로 민주인사를 탄압한 자들이 남아 있는 곳이 어디 경찰뿐이겠는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행했다는 독일에서도 신나치가 생겨나는데, 단 한번도 과거청산을 하지 못하여 미청산된 과거의 만물상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

친일잔재의 청산은 이 어정쩡한 민주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군부독재잔재의 청산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친일문제는 5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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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화요일 밤.

부정부패와 비리, 힘의 논리. 결과가 권력획득과 물질적 번영의 가시적 성과로만 나오면 그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관련된 모든 논의를 잠재우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의 뿌리 중 하나는. 친일문제

결국은 헤게모니싸움인데, 자신들의 토대인 아버지, 할아버지의 친일을 어떻게 인정하고 사죄할까.

인정하는 순간. 권력은 저쪽으로 넘어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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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젊은 세대에 대한 기성 세대의 얘기들.

어떤 성향에 대한 얘기. 

분리되어있다.

불쌍하다(알바해야만 하는,,)

어떤 때는, 불만이다.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만 본다,,)


아이들한테 문제가 뭐가 있다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만든 사회에 걔네들이 들어왔을 뿐인데.

대학 등록금 문제라든가,

고교졸업 80%가 대학간다든가

수단, 방법보다는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위주로 배워온 학생들이 사는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는거지.

학원폭력도 마찬가지고.

(아이들이) 나한테 필요없는 것에 대해선 굉장히 냉정해지는 거지.

기성세대가 만든건데,

근데 노력을 안 했느냐 그건 아니잖아,

금융실명제도 하고 민주화도 하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된 사회를 못 만든거지.

원인이 어디있냐, 우린 뭘해야 되냐,

카톡에만 매달려있고 불쌍하고 이렇게만 볼 문제 아니다.


이런 얘기를 진행하다보면, 뭐에서 만나는가 하면,

거대한 악과 만나게 되는거야.

90년대 초반 영화를 보면,

굉장히 촌스럽다. 배경이.

근데 그때 우리가 살았던 사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

택시타면 합승 물어보지도 않고 외국인 바가지는 기본,

지금처럼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들이 훨씬 많았던.

말도 안 되던 모습 정말 많았다. 

지금은 없어진 듯하게 보이지.


어떻게 보면 사회가 세련되어 진 것.

대학생들 드러나는 문제들 우리 삶의 모습들 보면

겉모습은 세련되어졌지만,

실제 상황은 더 안 좋아진 것도 있고

예전엔 싸워서 고쳐진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해서도 고쳐지지않는.

기름값, 통신료, 삼성 법정 불패의 문제,,,

이런 것들은, "택시, 저거 문제다" 해서 고칠 수 있는게 아닌. 밑바닥엔.

대학문제도

그게 사학인데, 사학에선 정부 지원 없는데 등록금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 논리를 정부는 꺾을 수 없는데.

근데 그 등록금이 과도하잖아. 그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올 사람은 많고,

일반인들이 예전처럼 택시기사랑 싸워서 해결하거나 하는.

그럴 수가 없는 문제.

 

사회 기저에서 파워를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들.

그런 것들이 데모해서 바꿀 수 없는 문제들로 밑바닥에서 잠재되어 있다는 것.

학생들은 어리더라도. 그걸 표현은 잘 못해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느끼는 거지.

정의를 외치고 할 수 있는 게 그러긴 너무 미약하다는 걸 느끼는 거 같다.

그러니,,,

그 불만이 표출시킬 순 없고 안으로만 계속 쌓이는,,,

우울증이니 학교폭력이니.

,,,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게 없는거지... 

해결하기도 어렵고,

대통령도 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삼성 그걸 우리가 보고 있는데,

그 공장에서 수십 명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도 잘못 없다고 하는데.

법정에 끌고가면 진다고.

느낌으로는 거대한 악.


대선도 문재인이냐 안철수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일정부분 사회 바꾸는데 도움될거라고 보는데.

사회적 통념자체가 바뀌어야 되는데

지구의 회전속도가 바뀌는게 아니라 그 축이 바뀌어야.

가장 중요한건 사람 사이의 믿음이 회복되어야

우리가 공유하는 이것이 옳다라는.

옳은 것으로 나아가야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야 되는데, 그게 작동 안 되는 사회.

 

삼성이 잘못했으면,

모든 국민이 삼성이 잘못했네 이렇게 얘기가 되야 되는데

새누리+조선일보에선 그래도 봐줘야되는거 아니냐

"국익을 위해".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거지.

이걸 바꿔야 되는데

이게 문, 안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문제는 아니다.

부동의 그 40%는 바뀌지 않거든.

정의가 아니라고.

생존과 번영이지.

이번에 문, 안이 되면 방향이 바뀔수는 있지만.

,,,,

한번 새누리, 한번 민주당 이게 아니라,

그럴려면 통념이 바뀌어야되고 지역구도 바뀌려면 복잡하지만 중요한 얘긴데,,,

계속 지역주의 공격해들어가다보면 결국 드러내는 것은 반공.

그 뿌리 , 이데올로기 기반.

지역주의 비판 와해시키려는 것은 ..ooo과  연결.

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반공.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는게,

프랑스나 영국, 스웨덴처럼 큰 변화를 겪은 나라들이 도달한 것처럼

사회가 변할 때는 큰 위기에 도달하는 시점.

87년처럼.

사회적 임계치에 도달하게되면,

큰 전환이 일어날 수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이 큰 일을 한거다. 또는 너무 빡빡하게 만들어놔서 신경 못쓰게 된,,

나라에 돈은 많거든,,

그 많은 돈들이 겉보기엔 예뻐지고 세련되어지고 하는 쪽으로, 잘 살아진게 아니라행태등이

임계치를 아직은 못 느끼는 상태,

박이 잡고 더 썩게되면 김영삼 때 IMF경험과 플러스되면 임계상황에 도달하지 않을까.

임계상황에 대한 공감대. 도대체 뭐가 문제지...라는.

  

막스처럼 이래야 한다 이게 아니라

국가의 형태가 이렇게 되야 된다, 틀 지워지는게 아니라

어떤 가능성들을 열어놓는

고정된 틀이 아니라

방향이 이러이러한 것들을 고려해야된다..

지금 입장에서 핵심은 자본에 대한 건데.

,,, 

ㅡㅡㅡㅡ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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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서 공유되는 가치.

근대화 시대의 일본.

번영기의 미국.

종전 후 독일. 일본.

6.25 후의 한국.

지금은 아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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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게 아니었어"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는 백배는 낫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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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구경하고 집어온 회보.

법문:

임제스님의 핵심적인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부족한 게 무엇이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현재 이대로 완전무결한 존재로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지 우리가 어떤 좋은 조건을 갖추어서 부족한 게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표현과도 같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알고 깨달아야 할 뿐입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결국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현재 그대로 완전무결하다고 하는사실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그 일을 위해서 용맹정진하고 기도하고 절하고 하는 그런 이치입니다.

우리가 법화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내 자신의 존귀성입니다.

자신의 존귀성을 제대로 알면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있으며 어디 가서 무엇을 구하려고 조를 필요도 없는 이치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형태는 교회와 비슷. 

물론 그런 형태로 운영될 수밖에 없겠지만.

,,,에 조예깊은 큰스님들을 모시고,, ooo대법회..

큰스님들의 사진과 법회 내용 포스터.

교회 부흥회 생각남.


,,,에 보시하신 분의이름을 넣어 드립니다.,,

100만원 이상-보시자 1인.

500만원 이상-가족 5인의 명단,

1000만원이상-가족 명단과 주소


방문객들이 자신의 소원을 써서 올려놓은 화분과 양초들 봄.

자신의 이름 또는  이니셜을 쓰고, 건강과 부를 기원. 사랑의 결실을 기원.

외국인이 be wealthy, be healthy 써놓은 화분.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모두가 같구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얘기했던,

확정적인 유리수가 아닌, 확정될 수 없는 무리수 같은,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불교얘기도. 그 깨달음에 닿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기도, 수행, 정진이라면,,

진리에 닿기위해 우리가 교회에서 했던 기도와 여러 행위들.

또는 산책, 독서, 여행, ....특정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그 행위들이 그런 수행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을까?


H:

근본적으론 같은거겠지.

뭔가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음악틀어놓고 생각하는 것 등...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허한 느낌. 같은게 있었는데그때의 내 주변의 허한 공기같은게 있었고

그걸 견딜수가 없었던.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던거지.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그땐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그걸 몰입할게 필요했던거지.

허하다는 느낌, 뭔가를 채워야된다는건데.

뭘해도 채워지지 않는거니 뭘해도 괴로운거지.

그 게임이나 그런것들이 메워주는게 아니라 잠시 연기시키거나

끝나고나면 더 크게 허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 해결될 수 없는 상태로 계속 가는거지.

(마음 속 허한 것을 채우려는욕구는 계속 남아있고

원인은 알지 못한 채로 그대로 계속가는거지.

수행 명상 목적은 같은거 아니겠나

괴로움 허함.을 벗어나기위한 다른 방법을 찾는거겠지.

...........

마음의 어떤 평온 같은것.

전문가인 불교적 수행, 명상 방법이 맞는거같다. (인류가 몇 천년동안 다듬어온 결과물로서의)

몸도 어떤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이게 한.

(그 방식은) 마음의 어떤 평안, 행복감에 대해 굉장히 정확하고 날카롭게 발견한게 아닌가.

컴퓨터 게임, 독서, 음악,....등의 방법과는 다른 형태의.

......... 

평안하게 있는 맛이 훨씬 더 좋고 더 오래가게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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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자본주의의 승리자였다,

그런데 2008년 월가 금융위기로,

왜 우리가 유럽 미국의 경제학자들 이론을 알고자하나?

그 경제체제 아래에서 살고있다,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아담스미스 부자들 편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아담스미스 가난한 사람들 지지했어요.

그가 시장개방 신봉이유 빈곤층때문.

런던대 경제교수:

막스가 최고 사상가인 것은 반대자도 동의

ooo:

케인스도 시장을 믿었어요.

인간의 열망을 위한 최고의 시스템이다라고.

ooo:

사실 하이에크는 우리가 자유주의 시장질서에 산다는 것을 부인할 것.

케인스 두 문제 해결하면 자본주의 생존가능할 거라고.

 

어떤 저항이 필요할 때 막스 다시 찾게 됨

경제위기 급진적 사상가 다시 주목받는 일이 놀라운 일은 아니죠.

 

아담 스미스 경전같은 존재. 다양한 이야기 끌어낼 수 있어요.

 

1759. 아담스미스. 글래스고 도덕철학 교수. 스코틀랜드 가장 먼저 세워진 대학.

비교적 수줍은 사람이었어요.

독신으로 평생 어머니와 살았죠.

사람들 본성과 행동을 연구해서는,

도덕 감정론 써냄.

근본적 질문.

그런데 어떻게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 판단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도덕적 행동해야,

마음속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으니 도덕적 행동가능하다고.

폭넓은 관심 불러 일으킴.

유명세로 특별한 행운.

찰스 타운센드. 양아들 대륙여행에 가정교사 일임.

3년 여행.

벤자민 프랭클린 등 만남.

견문록 쓰는데 국부론의 시작이었다.

 

18세기. 봉건질서 무너지고 자본주의 태동.

영국 산업혁명. 생산량 폭발 증가. 넓은 시장 필요. 자유무역.

중상주의.

아담 스미스 가장 화나게 했던 건 중상주의였어요.

한 나라 부란 금고에 금은이 얼마나 쌓여있나가 기준.

프랑스여행에서 만난 루이15세 주치의겸 경제학자 케네로부터

사회를 하나의 육체로 봄.

건강 유지위한 조건 연구.

사회도 식량과 원료 얻고 상품 유통해야 사회 성장.

세 계급 구성.

화폐는 그 3계급 돌면서 생산물 공급. 중농주의. 토지가 부 원천.

스미스에게 큰 영감 줌.

국부가 금은의 축적이 아닌,

새 정의 내리고 국부 증진위한 연구시작.

이제 나라가 부강해지는 법에 관한 책을 쓸거야.

어머니께 인사드리세요.

사촌 쟈넷과 어머니는 평생 의지했던 사람들.

집필과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국부론 쓰기 시작.

 

글래스고가 부유해지기 시작할 때였다. 담배 수출입 중심지였다.

항구가 있는 글래스고 경기 좋았다. 부흥 시작.

영국 공장과 항구. 18세기 자료 .

 

시장경제는 사회 자원을 적절히 배분할 수 있다.

국부론 집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황당한 행동 하기도.

철학관해 얘기하다가

빵 버터, 찻주전자에 넣은 일도 있다.

국부론 고민하며 걷다 교회종소리 듣고 정신차리니 16km지나친 경우도.

 

흄과도 자주 만났다.

마음은 한창인데, 죽을 때가 다가오는거 같아...

스미스: 우리가 빵 술 고기 먹게 되는 것은 자비심이 아닌 각자의 이기심 때문.

그 이기심이 경제 돌아가게.

보이지 않는 손.

분업. 노동, 국부.

 

흄의 가장 큰 공헌은 실증적 철학.

머릿속 구상이 아니라 실제 사물보고 현상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

스미스와 평생 친구

조지프 블랙. :이산화탄소 잠열 연구. 화학자.

제임스 허턴: 동일과정설.

매주 저녁 먹으며 많은 얘기.

혼자 핀 만들면 많아야 몇 개.

근데 18단계 제조공정으로 만들면, 어쩌구 저쩌구.

1776 국부론.

어디서든 노동이 이루어지면 부가 생산될 수 있다고 생각.

 

케네는 중농주의.

그러나 스미스는 노동이라고 말함.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정면으로 중상주의 반박.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그 상품 교환가치는 그 투입된 노동량으로 정의해야한다.

자유로운 시장만이 개인 국가를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

보이지 않는 손.

이 한 문장으로 완전한 자유시장 체제. 이상적으로.

1천부 팔림.

첫 장은 현대 경제학 개념보임.

 

종의 기원이나 뉴턴이론만큼 중요한 책이죠.

근대경제 기본원리 설명했어요.

분업 국민총생산, 무역 개방 중요성,. 보호무역의 문제점들..

 

최초로 자유시장 체제를 형성한 기본 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기본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스미스 사상

 

아담스미스 연구소장: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

자유무역 신봉, 거대정부 반대. 자유시장 경제 지지했어요.

그러니 부자들의 편으로 오해 받았다.

 

개인의 경제적 이기심은 사회의 도덕적 한계 내에 허용된다고 주장.

그 전에 쓴 도덕감정론의 주장과도 일치.

인간은 도덕적 존재. 경제도 그 일부.

국부론은 인간 행동 규범 안에서 생긴 것.

둘 중에 한 권만 읽어서는 알 수 없어요.

도덕감정론의 내용이 다시 국부론에 등장.

빈민에 대해 연민을 느끼죠.

대중 돕는 최선의 길은 자유시장경제라고 주장했어요.

그 이기적인 행동도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음.

 

1790. 죽음.

조지프, 태워주게.

출간할 수 없는 원고들이야.

완벽하지 않은 원고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나,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인간의 도덕적 범위 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체제라는 이상.

 

아주 놀랄 거에요.

미국 영국 등에 대해선 좀 실망할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유명한 문구.

국민이 대부분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데 그 나라가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다.

wealth of nations 국가가 복수. 여러 국가와 국민이 잘 사는 세상을.

 

그 이후 역사 전개. 프랑스혁명 등,,

노동자의 고통이 심해질 때.

칼 막스 등장.

bbc조사.

지난 1000년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가장 큰 영향 끼친 인물,

막스.

최초로 왜 가난한 사람은 항상 가난할까. 자본주의는 이상적일까에 대한 최초의 물음.

부품처럼 되어버린 노동자들.

젊은 시절 변증법에 푹 빠져있었다.

Das Kapital

헤겔 변증법은 정반합의 법칙으로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절대정신: 세상 변화 발전시키는 주체이 주장엔 동의 안함.

오히리 포이에르 바하 유물론에 동의. 물질이 세계를 구성 지배 이끌어간다는.

변증법에 유물론 더해 유물론적 변증법.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철학과 관점을 제시.

 

1843년 쾰른. 막스는 반정부 신문 편집장.

막스는 교수가 되려했던거 같아요.

하지만 무신론자에게는 불가능. 생계 꾸리려 언론계로.

정치 흥미 갖기 시작.

기자로서 진짜 돌아가는 세상 상황 알고 충격을 받았죠,

변증법을 이해조차 못하는 프로이센 멍청한 검열관들이 내 글을,,,,하다니!

라인신문 폐간.

나는 자유도시 파리로 갈테다.

1844. 카페 드 라 레장스.

그 인생 가장 중요한 두 개 만남.

공산주의 + 엥겔스.

 

엥겔스는 막스가 정말 훌륭한 사상가라고 생각했어요.

한마디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후원자였다.

그는 계속 막스가 글 쓸 수 있기를 원했고

자본론 1권 마칠 때까지 돈을 계속 보냈다.

 

맨체스터 방직공장 어린애들도 매일 12시간 이상 공장에서 일한다.

1800년대 아동 노동자들 사진.

학교는 꿈도 꿀 수 없지. 지옥이 따로 없군.

새 계획 세우고 혁명을 준비해야지.

 

엥겔스보다 막스는 최고 사상가입니다.

런던대 철학 교수,

하지만 둘 중 한명과 저녁 먹으라고 하면,,엥겔스가 더 좋은 거 같아요.

자기주심적 막스 자기 생각에 갇혀 비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얘기 안 들음,

비판하는 것 외에는

반면 엥길수 문화적 관용적 즐거운 사람이었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 만나니.

점차 혁명적 공산주의자로 바뀌게 된다.

계급없는 세상 만들겠다고 혁명 준비.

 

브뤼셀. 1845. 프로이센 국적 포기.

비밀 동맹과 접촉.

1848. 두 사람은 공산당 선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을 밝히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노동자가 잃을 것이라고는 단지 자신의 사슬뿐이다.

노동자 현실보고 개선방향 찾고 자본주의 체제 안 변화가능한 것들 연구했다.

위기 탄압.

1848년 유럽. 혁명의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

붉은 박사라는 악명과 인류해방가져올 새 사상 창조했다는 명성 동시에 갖게 됨.

잇따라 추방령.

쾰른.

신라인 신문 발행. 폐간.

혁명 결국 실패.

1849. 런던으로 망명. 생활고.

부인: 당신은 최악의 아버지야,

아들 폐렴으로 사망.

궁핍한 생활 5년동안 계속.

6명 중 3명의 아이 잃음,

막스는 정기적 수입이 없었다.

원고료 받긴 했으나 항상 돈 문제에 시달렸다.

1851-1856 막스가 살던 런던 집.

엥겔스의 기부금과 막스 유산 덕분에 연립주택 이사해. 안정되자 자본론 집필 시작.

낮엔 대영도서관 글 쓰고,

주말엔 소풍 또는 다른 독일 이민자와 교류.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자본주의의 모순 분석. 그 문제점 지적위해,,,

국부론을 수백번 읽었다.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 국부론.

1867. 자본론 제1. 출간. 자본의 생산과정.

유물론적 변증법을 경제연구에 최초로 적용해 자본주의 문제점 밝힌.

1: 상품,

사용가치+교환가치=상품

노동을 통해 생산해낸 것,

상품가치는 상품 생산에 들어간 평균 노동시간으로 결정.

화폐는 상품 가치 표시 수단.

화폐의 물신성이 생겨날 거라고 경고. 돈이면 다 될 수 있다는,

리카도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 이어받아 노동이 최고 가치라고,

그러나 분업은 기계 부품으로 노동자를 만든다고,

그러나 자본론 주요목적은,

왜 쉬지않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항상 가난할까,,,

왜 자본가는 계속 부자가 될까,

라는 의문 풀기위해서였다,

그 이유는 이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냄으로써

1권은 자본이 이윤을 어떻게 남기는가에 대한 것.

절대적 잉여가치 원리 설명. 노동시간 노동일수 늘리는,,

기계는 빵 만개를 만들면 수명 다한다면,

1 노동시간.

밀가루+기계+노동자

노동시간 계산 예.

기계나 원료는 그 가치가 그대로 인정되는데,

일당으로 3천원밖에 안주니,

나머지 5노동시간은 자본가의 주머니로,

잉여가치.

그러나 노동자는 왜 싫다고 못할까요.

자본가가 해고하면 끝이니.

더 오래 일하게 한다. 일당은 더 안준다.

착취통해 부 얻는.

절대적 잉여가치: 노동시간 연장으로 만들어진,

더 많은 이윤위해 노동 생산성 높이는 것.

손으로 3시간, 기계는 1시간이면 되니.

필요노동시간은 줄고, 잉여노동시간은 늘고,: 그래서 상대적 잉여가치가 생김.

임금은 싸지고 ,,

 

막스는 최초로 착취하는 자본주의 본질을 이해했어요.

착취 현상이 일어날 것을 예견.

자본가 이기심 때문에 기계가 노동 대신 실업자 증가, 임금하락,

상품은 안 팔릴테니 시장 붕괴, 공황, 혁명,

으로 봤는데...

막스는 자본주의를 역사 한 과정으로 봤다,

공산주의가 도래할 거라는 구조 설명해 냈다.

1883.

엥겔스에게 편지.

우리가 파리에서 꿈꿨던 세계는 결국 오지 못할 것 같다

내 삶의 마지막까지 통찰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독불장군 같은 나를 변함없이 지지해줘서 고맙다

남은 열정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아끼던 의자에서 사망.

막스 딸 제니와의 고백게임.

불행은 굴복하는 것이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책장에 파묻히기.

 

엥겔스 1885 유고 모아.

자본론 2권 자본의 유통과정

1894 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출간.

사회주의의 성서.

 

한 세기 흐른 후 레닌. 모택동.,,,

그러나 그들 중 단 한명이라도 올바로 이해하 사람이 있었을까?

칼 막스.

억압받는 노동자들 도와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세상을 해석한 철학자

자본주의를 분석한 경제학자,

공산주의 탄생에 영향 끼친 사상가.

 

철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했다는 것.

북한 대립 중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동안 입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인물.

 

왜 자유롭게 얘기가능?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이 휘청거리긴 하지만 붕괴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공산주의 국가가 20세기 말 붕괴했으니.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쟁에서 승리하자

막스와 막스에 대한 책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 가지게 됨.

 

출간 후 140.

자본주의 지배하는 이유만으로 자본론은 가치 없나?

자본주의 새롭게 살아남았던 것은,

막스의 경고가 메시지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그는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연민과 열정으로 자본론 쓴 것.

교수들 얘기:

자본주의 경기가 좋으면 신문 사설에 종종 결국 막스가 옳았다 사설 실린다.

 

자본주의는 생산 쉬워진 신용화폐로 미래에 투자한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

동시에 빚 양산 디폴트 일으키고 위기 가져온다,

 

국부론. 자본론.

꿈꾼 이상적 사회. 지금의 모습은 아닌데,

,,,,

사상의 시작점은 인간에 대한 사랑.

그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

 

자본주의는 아담스미스를 오해. 공산주의도 막스를 오해.

꿈꿨던 세상은,

소수 지배 독점, 탐욕이 아니었다,

스미스가 이기적 본성에도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다고 밝혔듯이

위기 순간 우리 안의 관찰자를 기대.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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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규어 로스 모음 /

음악 2012. 9. 1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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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혁 & 성시완









Manfred Mann's Earth Band  Questions "  


In a dream it would seem
I went to those who close the open door
And turning the key I sat 
and spoke to those inside of me

They answered my questions with questions
And they pointed me into the night
Where the moon was a star-painted dancer
And the world was just a spectrum of light

They reached to my centre of reason
And pulled on the touchstone that's there
The shock of that light had me reeling
And I fell into the depths of despair


Turning the key I sat 
And spoke to those inside of me

They answered my questions with questions
And they set me to stand on the brink
Where the sun and the moon were as brothers
And all that was left was to think

They answered my questions with questions
And they pointed me into the night
The power that bore me had left me alone
To figure out which way was right ......










Posted by 메모와 일기
,

G의 앞으로의 인생이 그려짐.

한 회사의 자본가나 CEO의 대리인으로서 고용된 후.

그 경직된 리더쉽 방식 고수.


감성적으로는 자기 충족적인 그 폐쇄 구조 속에서,

몇몇 문학적인 문장을 인용하고

적당한 레토릭과 섞어 자신의 감성을 되새김질하는.


의식적으로 끄집어내어 스스로에게 문제 제기하지 않는 이상,

마음 깊은 곳엔 그 충돌, 불일치에서 나오는 괴로움이 지속될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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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얘기한,  백지연 피플인사이드ㅡ 이석기 인터뷰.  2012. 5.

흥미롭게 봄.

역시 예상했던 대로 종교적 필을 물씬 풍기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보통 사람들하고 다릅니다정말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인 새로운 세상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소박하게 일 하는 사람들이 주인된 세상을 건설하려고 뛰어든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진보 정당이 근간은 "진성당원제"라고 우리나라의 유일한 정당입니다. 당원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정당이거든요

백지연: 당원이 굉장히 중요하신거죠?

///

백지연: ,,, 국민을 대표합니까, 당원을 대표합니까? 이건 제가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여쭤보는거예요

이석기: , 전 구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 한 것은요. 그게 좀 적절한 비유는 아닌데 옛날에 TV에 무슨 체험 생활 현장 이런 거 있잖아요. 노동하면서 근로하는게 힘들다 땀 흘리고 그 사람들에게 통용되는거다. 우리 진보 정당의 당원들은 다 국민이에요. 그러니까 당원과 국민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백지연: 굉장히 명확히 할 부분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여론에 대해서는 여론의 움직임이 이러해도 우리 진성당원의 뜻이 반하면 나는 사퇴할 수 없다. 

이석기: 아니 사퇴할 권리가 없는 거예요.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제가 스스로 사퇴할 권리가 없어요. 우리 당원들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면 해임권한도 당원들에게 있는 겁니다. 

백지연: 네, 그 말씀은 당원으로서 제가 수긍이 됩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실 때 우리 당원들은 참 특별하거든요 말씀하셨는데, 통합진보당 뿐만이 아니라 새누리당 민주당 어느 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당원들 아닌 분도 굉장히 많으시거든요. 그분들 진짜 특별해요. 진짜 열심히 일하세요. 

이석기: 네, 맞습니다. 

백지연: 그분들의 생각도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닌가요? 

이석기: 그 점은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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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이석기 얘길 들어보면,)

세상에 대한 불신같은게 깔려있고 자기네 것은 합리화시켜서 논리를 만들고.

그걸 집요하게 물어보면 감성적인 걸로 회피. 당원, 사람,,, 이런 식으로.

외부에 대해 물어보면 악마와 싸우는 천사의 개념.

,,,

사람이란게 참 신기한거 같다.

,,,

경직된 그 내부의 연대의식.

종교적 상태까지 연결.

자신들 외의 외부세계는 적으로 돌리고,

현실에서 당장은 힘을 발휘 못해도 우리는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고.

고귀하게 그 가치로서 살아남아야한다.

유리알 같은 맑은 정수를 자신들이 갖고 있다는,,,

세상은 적으로 보고,

우리는 고귀한 것으로 보고.


고귀한 가치와 동기.

끈끈한 정.

눈물 글썽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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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탈북 그 후"

새터민 청소년 생활공동체 "우리집". 여름. 캠프.

탈북 청소년 얘기:

북한에선 친구 관계 정말 친하다. 

근데 남한에선 다른 사람을... 자기가 어떻게 되기 위한 수단,  어떤 과정으로 생각하는거 같다.

앞으로의 소망ㅡ  정말 OO한 친구를 사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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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재영 / 철학자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2500년 전에 플라톤이 물었던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

그는 왜 이렇게 말을 비비 꼬았을까?

대체로 언어를 변형시키는 것은 시인의 몫이지 철학자의 몫은 아니다. 

때로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말을 찾지 못하면 말을 비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어에는 일상적 언어와는 다른 어떤 울림이 있다

하이데거는 철학이 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철학적 사유는 익숙하고 명료하며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낯설고 모호하며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철학이 명료한 체계를 우선하는 과학보다는,

모호하지만 울림을 주는 예술에 보다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시작(詩作)을 ‘철학의 누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또한 그는 독일의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Novalis, 1772-1801)의 시구를 빌어서

 “철학은 향수이며,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고자 하는 하나의 충동”이라고 이야기한다. 

...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은 이 점을 망각하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뿐, 

‘철학에서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세계는 단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만으로 세계는 온전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간파한 것처럼 세계는 숨기를 좋아한다.

더욱이 과학적 탐구 방식으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 존재 양식을 가진 존재도 있다.

바로 인간이다.

...

하이데거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철학으로부터 시작하는 물음은 항상 형이상학적 물음이라고 강조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물음은 가장 궁극적이고 포괄적이다.

철학은 오로지 철학함으로서만 존재하며, 

그 점에서 철학은 결코 형이상학적 물음과의 대면을 회피할 수 없다.


세계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동원한다.

...

도대체 무슨 뜻인가? 

...

물리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사물은 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학의 눈으로 볼 때, 강낭콩 잎과 구더기는 DNA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의 경험에서 원자나 DNA는 자신을 현시하지 않았다.

아마도 물리학자는 시인의 경험이 물체의 표면에서 반사되어 튀어나온 빛의 파동에 불과하다고 시인을 설득할 지도 모른다. 

이 때 물리학자의 논증은 현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물리학자는 시인이 현실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그 경험을 물리학적 용어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경험은 물리학자의 물질 작용의 인과적 설명으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세계를 단순한 물리적 대상의 총합으로 환원하는 데 반대하는 이유다.

...

이것은 된장을 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또는 된장을 화학적으로 분석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삶의 세계를 고려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제 아무리 훌륭하게 된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더라도 시인의 아내가 왜 된장에 콩 잎을 덮었는가를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이 맥락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삶의 장으로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구조적 계기와 요소들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세계를 직접 만나볼 것을 권한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는 힘을 키우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현상학적 방법으로 세계와 직접 대면하라는 뜻이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만나는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Habermas)는 하이데거 철학의 공헌을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가고 있는 생활 세계의 위기를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하이데거가 지향했던 철학의 궁극적 과제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존재의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숨을 죽이며 연구한 것”이었지만, 그 후로는 긴 침묵에 빠져버렸다. 

그러한 존재 물음은 결코 제기하지 말아야 할 것, 또는 너무나 자명한 것, 또는 내용이 텅 비어서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서양 철학은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았다. 

그 결정적 계기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에 있다.

...

하이데거가 정의한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구분이 선명하게 파악되는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 

...

그는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말한다.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로도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굳이 그를 분류한다면 서양 2500년 존재의 역사를 새로운 사유의 틀로 선보인 형이상학자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

신문도 거의 읽지 않았으며, 집에는 텔레비전 수상기도 없었다.

그는 글을 읽고 쓰고, 철학적 사유를 하는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오점이란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말한다.

...

[슈피겔]이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지만,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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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의 1889년생 동갑. 

하이데거

아돌프 히틀러.

토인비

채플린.

비트겐슈타인.

네루.

허블.

장 콕토.

김좌진.

홍사익.

야나기 무네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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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규어 로스.

십여년간 눌러놓았던 감성 어떤 한 부분을 되살려주는, 강렬한,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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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2000. 7. 19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0/001005000200007191901070.html

[특별기고]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거부한다

나는 714일자 <조선일보>를 우연히 보고서야 내가 지난 5월에 13년 만에 간행한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이 동인문학상의 심사대상에 올라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나는 책을 내고 나서 여러 신문사와 합동기자간담회를 하면서 계기가 되어 <주간조선><조선일보>에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그 일로 `<조선일보>의 파쇼적 논지'에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내 책을 낸 창작과비평사와 함께 싸잡혀서 질문과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밝히자면 나는 시장에 내놓은 상품으로서의 책의 광고와 선전에 어느 매체가 동원되든지 알 바 없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과 추구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따라서 내 책에 쓰여진 내용에 대하여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시장에의 대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장에서 힘을 얻지 못한 문화 물건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게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군사 파시즘과의 결탁으로 성장한 <조선일보>침묵과 수혜의 원죄의식으로 동참하게 된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그로서 막강한 언론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시대에 사회의 기초 공리는 억압에 의하여 말살되거나 부인되었으며 그 반대의 가설이 산더미처럼 재생산되었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 언론이 우리의 역사발전을 위해서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당위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본주의 시장을 향하여 `전업작가'로 먹고 사는 나로서는 책을 내놓고 다른 상품들처럼 광고와 소개는 하여도 그 지면에 글은 쓰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워 두고 있었다. 요즈음에 생각이 정리된 뒤에는 어떠한 빌미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지고 말았다. 

왜 또 내가 해야 되냐? 하는 푸념도 나오고 귀찮으니 옆으로 비켜서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앞장서서 편들기'는 작가의 옳은 밥 먹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른바 `안티 조선' 측이 소극적 진영주의로 `충실한 반대당' 식의 내부적 권력이 되어 버릴 위험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론 개혁을 위한 구체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의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시 내게 관련된 동인문학상의 심사경위로 돌아가자면, <조선일보>는 몇몇 작가 평론가들을 `종신 심사위원'으로 선정해서 `공개적'으로 심사한다고 한다. 심사위원들 면면을 살펴 보니 문단에 나온 지 38년이 되는 내게는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많았다. 심사의 대상이 된 후보자들도 수십년 차이가 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즈음 <조선일보> 정치·경제·사회면에서는 종전보다 더욱 반개혁적이면서도, 문화면에서는 `다양성'을 보여 주려고 하는 교묘함을 보이고 있으며, 보다 이질적인 문인들에게는 단 몇 매짜리의 칼럼 한 편에 다른 신문의 무려 다섯 배 가까운 원고료를 지불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는 냉전적 공격과 터무니없는 폭로로써 `권력'을 누리고 이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를 유지해보려 하는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심사를 한다면 그 위원들과 <조선일보>는 앞으로도 수십년간 불변할 것인지. 앞으로 수십년 동안 수많은 미래의 심사 대상자를 동시에 관리하려는 것인지. 전망이 안 보이는 자들은 역사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불변할 것이라고 믿겠지만, 하늘 아래서 역사와 사람의 가장 큰 특성은 변화에 있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보고 있다. 

문학상의 상업주의와 사이비 권력놀음 따위의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실상은 <조선일보>가 특정 문인 몇 사람을 동원하여 한국문단에 줄 세우기 식의 힘을 `종신토록'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같은 잣대 위에 올려 놓고, 공개된 신문지상에서, 불공평하게도 의견을 내놓은 자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은 채, 내용과 별 상관도 없는 말 몇 마디로 `탈락'이니 `잔류'니 하고 치워버리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권리인가? 무슨 경품 뽑기 대회도 아니고 불량품 가려내기도 아닐진대,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 식의 사이비 권력놀음을 당장 걷어 치워라. 

심사에 동참한 동료 문인들에게도 엄중히 항의하건대, 나는 변변치는 않지만 떳떳하게 살 권리가 있는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욕을 보이지 말아 주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문학상이 세계관의 한 표현일진대 나는 <조선일보>측의 `동인문학상'뿐만 아니라 현대문학에서의 동인의 위치에 대하여도 이견이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귀측의 심사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일단 밝혀두려고 한다. 

2000719일 황 석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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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월간말.  2001년 184호.

동인문학상 거부합니다 

제32회 동인문학상 후보 거부한 공선옥 

작년 소설가 황석영이 후보를 거부해 동인문학상에 대한 시비가 거세지자 조선일보가 자존심이 상하긴 무척 상했나 보다. 올해는 좀 더 탄탄한 방법으로 ‘후보’들을 관리하고 나섰다. 지난 9월 3일자 조선일보에 동인문학상 후보작이 발표되고 다음 날 문화면에 신설된 「작가들은 말한다」라는 연재가 그것이다. 

소설가 공선옥씨가 자신의 작품(『수수밭으로 오세요』 여성신문사)이 후보작으로 오른 걸 안 것은 조선일보 문학 담당기자가 「작가들은 말한다」에 실릴 글을 공씨에게 청탁할 때였다. 하지만 점잖게 사양했다. ‘거부’라는 말조차 조심스러웠다. 문단 선배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추천해 주신 분들께는 감사하지만”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이청준과 박완서는 “시골에 틀어박혀 아이 셋을 키우며 살아가는 작가의 투박하고 건강하면서도 동시에 힘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세계”라고 추천이유를 밝혔다. 

“기자한테 그랬다. 나 솔직히 돈은 탐난다고. (내가 거부한다고 하면) 비웃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떨어지는 감 받아먹으려고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입 떡 벌리고 있긴 싫다. 작가가 작품으로 말했으면 됐지 구구절절이 뭘 더 말하라는 건가.” 

무엇보다도 공씨는 작가들로 하여금 직접 자기 글을 쓰게 하는 조선일보의 저의가 불쾌했다. 이에 대해 담당기자는 “작가가 직접 써야 재밌을 거 같아서” “불편하다면 기자가 대신 쓸 수도 있다”라며 설득했지만 공씨는 “그 의도란 게 뻔한 거 아니겠느냐”고 일축한다. 

거기에 글을 쓴다는 건 후보를 수락한다는 증명서류고, 나중에 수상거부로 일이 커지는 걸 막으려는 장치 아니겠나. 상 달라고 글까지 쓴 마당에 나중에 조선일보 비판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작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거다.” 

하지만 담당기자는 후보작을 발표한 기사가 이미 넘어간 상태라며 공씨의 거부의사를 지면에 반영하지 않았다. 공씨는 “상식선에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일제시대 천황폐하 만세 부른 거나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용비어천가 부른 거까지도 좋다 치자. 이건 견해가 다른 문제가 아니다. 조선일보는 마치 불특정 다수가 소수의 특정인을 미워하는 원시적인 폭력성 그 자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보수는 전통가치를 지키자는 건데 전통 중에도 좋은 게 많다. 하지만 그들은 무조건 자기들끼리만 잘 살면 된다는 사람들이다.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도 퍼준다고 난리 아닌가.” 

담당기자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생각해 달라”며 설득했지만 그조차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매사에 정치적인 의도를 깔고 있는 사람들이 작가더러만 순수하라니, 열네 명 중 그래도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 하나쯤은 들어가야 구색이 맞는다고 생각했을까? 


‘줄세우기’식 조선일보의 작가관리  

공씨의 ‘동인문학상 사절’은 작가정신에 대한 천착에서 비롯되었다. 

“글쎄 작가… 작가… 작가는 ‘안다’는 사람들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질곡에 빠져 있다. 질곡이란 운신이 힘들다는 거다. 그렇게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의 숨통을 조금이라도 터주는 게 작가역할 아닐까. 장사가 잘 되는 신문에서 주는 상을 받거나 글을 쓰면 그 신문이 가진 독자만큼 작가는 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부유하게 살면 인간적으론 행복할지 몰라도 작가로선 불행이다.” 

작품과 작가는 따로 떼 놓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공씨의 생각이다. 

“작가는 문학적 존재이자 사회, 정치적 존재다. 작가를 또 하나의 정부라 부르는 이유가 뭔가. 작가에게 정부를 넘어서는 권위가 부여되는 건 도덕성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그래서 중요하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조금 양보하고, 또 있는 사람은 투명한 부가 유지되는 사회를 위해 작가가 향도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근데 도덕성 없는 사람이 도덕성 운운하니 도덕성에 대한 냉소만 남았다.” 

그런 점에서 문학상을 둘러싼 작금의 모습은 실망스럽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기금을 만들어 조용하게 줬음 좋겠다. 상이란 격려하자는 건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 박탈감 느끼게 하면서 받는 상은 문단 전체를 초라하게 만든다.” 

공선옥씨는 원고료만으로 먹고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수입이 많아서가 아니다. 20만 원도 좋고 50만 원도 좋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어찌 사나 싶지만 그래도 네 명 식구가 살아진단다. “쌀만 있으면 되는데, 뭘.” 그동안 펴낸 책들에서 나오는 인세가 고정수입이랄 수 있는데 ‘없는’ 출판사 만나 이번 작품은 광고 한 번 ‘못 쳤는데’ 그 수입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래도 돈(상금) 생각하면 하루에 기와집을 몇 채 올렸다 허물었다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그 여지도 없어졌네(웃음). 없는 사람 마음이 그렇지 뭐.”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게 떨리는 상이 아니라서 마음은 외려 가볍단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 시간 뒤 공선옥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요지인즉, 작년에 한 번 조선일보에 시론을 쓴 적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되겠느냐는 우려였다. 당시 담당기자의 청탁도 집요했지만 돈이 궁하던 차, 다음날 바로 고료(50만 원)을 준다고 해 장원사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노라며 ‘마음의 불편’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기자는 설득했다. 동인문학상은 조선일보와 문단의 불편한 정도를 넘어 ‘위험한 관계’로 가는 훨씬 비싼 대가(5천만 원)인데 그 ‘줄서기’에서 이탈한 공씨의 자격은 충분하다고.)   

박형숙 기자 hspark@digital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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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2003/12/24 15:14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312/h2003122415134824160.htm

지난 18일 오후, 예전에 일했던 신문사의 문학 담당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 선배, 오늘 아침자 조선일보 보셨어요?” “안 봤는데요.” “선배 소설집이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던데요.” “그래요? 별일이군요.” “어떡하실 거에요?” “글쎄요, 기사를 못 읽었으니…” “그럼 기사 읽어보세요. 제가 저녁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다시 전화할 건 없고, 해 가기 전에 술 한 잔 합시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 후배 기자가 내게 물은 것은 내가 조선일보에 대해, 그리고 그 신문이 운영하는 동인문학상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학을 뗀 이래 줄곧 그랬으니, 꽉 찬 6년을 조선일보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셈이다.

집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나는 이 신문을 보지 않는다. 아침에 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이는 신문은, 내가 매일 한 귀퉁이를 짧은 칼럼으로 채우는 한국일보를 제외하면, 흔히 ‘한경대’라고 불리는 비교적 중도적인 매체들이 전부다.

언론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처지에, 우리 사회에서 실팍한 영향력을 지닌 신문을 아예 외면하는 것은 직업적 불성실이라 비판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세칭 안티조선 운동에 공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조선일보에 아예 무관심해지는 것이 그 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비판하는 것 못지않은 효과적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는 왜 안티조선 운동에 공감하는가?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썼듯, 그 신문이 수구 냉전 복고세력의 선전국일 뿐만 아니라, 신문 지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기 쉬운 글쓰기의 권력화를 가장 비도덕적으로, 현저히 정치적으로 드러내왔다는 판단 때문이다.

나는 왜 동인문학상에 비판적인가?

역시 다른 자리에서 지적했듯 그 상이, 특히 심사위원단의 종신화와 상금의 파격적 인상 그리고 상시적 독회 평가의 기사화를 뼈대로 한 세 해전의 체제 개편 이래, 한국 문단에 대한 조선일보의 아귀 힘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배 기자와 통화를 마치고 자료실로 가 참으로 오랜만에 조선일보를 펼쳐 보았다. 문화부 김광일 기자의 이름을 단 그 기사에서는 호의가 배어났다.

그 기사의 호의적 분위기는 나 자신 겁 없이 덜컥 내놓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소설집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격려차 건넨 의례적 덕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심사 독회에서 나온 쓴소리들을 선의로 생략해버렸을 김 기자의 배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분들의 호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작품의 됨됨이로 보나 조선일보에 대해 취해온 입장으로 보나 도저히 이 상의 수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 얼굴을 지면에 실은 데 대해 조선일보 쪽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조선일보와 동인문학상에 대해 던져온 비판적 발언들을 김 기자나 심사위원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한 움큼의 유쾌함도 내가 누릴 수 없는 것은, 주겠다는 상을 거부하겠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사 독회에 올랐을 뿐 수상자로 선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거부라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다고 제 작품이 제가 비판해온 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는 꼴은 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나쁜 뜻이야 없었겠으나 결국, 조선일보 지면은 나를 조롱한 셈이다.

비록 선의에서라고 할지라도 이런 조롱의 장면을 만들어낸 분들께, 나는 이 상과 관련해 내 이름이 거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정중히 전하고 싶다. 끝으로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지적을 하나 하고 싶다.

김 기자는 내 소설집 제목을 ‘엘리아의 노래’라고 썼으나, 그것은 ‘엘리아의 제야’로 고쳐져야 할 터이다. 제야가 코앞이다. 두루 근하갑신(謹賀甲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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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카테고리가 오직 한 가지 색깔의 정치 테제아래 종속되어 기사화 된다는 것.

오히려 반대로, 인문 철학 예술 문화의 토대위에 정치적인 것들이 만들어져야 되는 것인데.

모든 철학 인문과 예술,,,,그 내용이 정치적 동기를 위해 복무하는 글쓰기.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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