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선

카테고리 없음 2012. 10. 22. 21:45

월간 조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07100050&ctcd=E

사람의 죄는 소유와 욕심에서 나와… 이걸 없애자는 게 공동체

원경선의 소원은 간단했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우리 땅을 소중히 여기고, 무공해 농사를 비롯해 미래의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원 원장을 미래와 환경을 생각하는 할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유기농 식품회사 풀무원의 모태가 된 풀무원 농장 설립자인 그의 평생 직업은 농부였다. 그냥 농부가 아니라 생명 농부라고 부르는 것은 국내에서 유기농을 처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사법을 한평생 고수해 온 원 원장은 지난 417일 아흔아홉 살 생일인 백수(白壽)를 맞았다. 이번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통합당 원혜영(元惠榮) 의원 등 25녀와 며느리, 손자, 증손자를 합쳐 37명의 자손을 두고 있다.

원 원장의 건강비결은 현미와 유기 농산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1975년부터 현미식을 시작한 원 원장은 요즘도 세 끼 식사를 유기농 현미 잡곡밥과 채식 위주의 반찬으로 한다. 어릴 때 영양실조로 간디스토마를 심하게 앓아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유기농 현미밥을 먹으면서 이런 증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원경선의 100년 삶은 땅, 생명, 이웃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1914년 출생한 원경선은 평남 중화군의 빈농(貧農) 아들이었다. 아버지(원낙범·元洛範)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김승수·金承水)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밭일을 했으나 가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보통학교를 가까스로 마쳤다. 그나마 도() 장학금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열일곱이 되던 해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러던 어느날, 군청에서 농촌 자력갱생 운동의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영농자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신청한 적도 없는 자금이었다. 알고 보니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 10원 가운데 아껴 쓰고 남은 돈 150전을 학교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감동한 일본인 교장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 같은 전도사가 되기로 했다. 그가 속한 교단은 퀘이커와 비슷한 평신도 독립 교회를 주장하는 형제단(브레들린·Brethren)이었으므로 목사가 없었다. 전도사가 되려면 신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던 만큼 우선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야 했다.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우유 배달을 하고, 낮에는 목장에서 막일을, 밤에는 공부를 했다. 잠은 3시간을 넘지 못했다. 어차피 정신력에 의지해 가는 길이어서 몸은 억지로라도 따라와 주었다. 다만, 생전 처음 하는 영어 공부는 혼자 힘으로 해 낼 수가 없어 학원을 다녔다. 결국 이 도전은 전차에 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석달 만에 좌절됐다.

원경선 부부는 결혼 이듬해인 1939년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떠났다. 아내의 뛰어난 타자 솜씨를 밑천으로 삼아 작은 등사 인쇄소를 차렸다. 두 사람의 성씨를 따 상호를 지원인서사(池元印書社)라고 했다. 금세 직원이 20명이 넘어설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원경선은 부천에 처음으로 가족공동체를 꾸리고 포도를 심었다. 그러나 첫 해 농사를 짓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져 버렸다. 전쟁은 원경선의 인생에 또 한 번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기독교인인 데다 땅도 적지 않은 지주계급이라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재촉했다. 그는 공동체의 노인들과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부천에 남았다.  

한번은 인민군에게 무작정 끌려가 부천 소사읍사무소에 갇혔다. 그들은 원경선에게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고, 그는 종교인이라 당원 자격이 없다고 버텼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원경선을 두들겨 패고 따귀를 때렸다. 그때 고막이 파열되는 바람에 지금도 왼쪽귀를 듣지 못하게 됐다

1·4후퇴 때는 졸지에 마흔의 나이에 국민방위군에 징집돼 제주도 훈련소로 갔다. 부패한 군인들이 쌀과 옷을 빼돌리는 바람에 제주도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19525, 천신만고 끝에 귀가했다. 천행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여섯 살짜리 둘째 아이가 디프테리아로 약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성이 막 멈춘 1955년의 한반도에는 탄피처럼 여기저기 전쟁고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들, 넝마주이들을 데려다 거친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가르쳤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자는 원칙을 세웠다.

농장의 이름은 녹슬고 쓸모없는 인간을 풀무질로 달구고 담금질해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터전이 되자는 의미에서 풀무원이라고 붙였다. 충남 홍성에 풀무농업학교(현 풀무학교)가 있어, 원경선은 그 학교 주옥로 교장에게 우리 공동체 이름에 안성맞춤인데, 그 이름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풀무원 공동체는 사유재산을 아주 예외로만 인정했고, 모든 것을 공동체 소유로 했다.그러다 보니 사소한 먹거리 하나를 두고도 아귀다툼이 벌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 고기 한 점 더 먹이겠다는 싸움 끝에 보따리를 싸 들고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생겨났다.

원경선이 12살 손위의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경, 스물두 살 무렵이었다. 무교회 운동을 벌이던 선생의 주장에 원경선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YMCA에서 있었던 선생의 목요강좌에 자주 들렀다. 

선생은 나중에 무교회주의도 버리고 보다 더 자유로운 퀘이커교도를 선택했다.  원경선은 공동체를 출범시킨 뒤 땅에서 바른 생활을 일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갈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 선생과 원경선은 농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선생은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세우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그런 선생은 농사이야기를 하기 위해 원경선이 운영하던 공동체를 찾아 부천과 양주를 자주 들렀고, 원경선도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경선은 함 선생의 글쎄의 의미가 만사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어서 

함 선생이 그만큼 생각이 넓고 크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함 선생은 농사와 자유로운 신앙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원경선과 통하는 면이 많았다. 그러나 원경선은 함 선생이 농사를 통해 바른 일꾼을 길러 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여러 모로 격려해 준 스승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원경선은 유기농업에 관한 어떤 지식도 없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증산(增産)만이 농업의 최고 덕목이던 시절이었다. 농촌진흥원 같은 기관의 지도에 따라, 통일벼 계통의 다수확 품종이 권장되고 있을 때였다. 밭은 밭대로 농약과 화학비료의 즉각적이고도 환상적인 효능에 사로잡힌 농민들에 의해 약 범벅이 되어 갔다. 

많을 때는 60~70명에 이르는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었던 풀무원 농장도 시절에 맞게, 그리고 현실이 절실해서 다수확을 제일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를 멀리할 아무런 이유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원경선은 고다니를 부천으로 초대했다. 그가 한밤의 회동을 끝내고 돌아온 그 이듬해 고다니가 부천에 왔다. 고다니는 이렇게 외쳤다. 

일본은 패전 후 그저 식량증산을 위해 무분별하게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사용해 왔습니다. 비록 생산량 증가에는 성공했지만, 이러한 농법은 결국 모두가 자멸하는 길일 뿐입니다. 제발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아 주십시오.”   

원경선은 그 내용 중에서 당장 자신이 실천 가능한 영역을 찾아 냈다. 닭이나 소, 돼지가 사람 하나에게 필요한 열량을 낼 만한 고기를 생산하려면 사람 넷에게 필요한 열량을 낼 만한 곡물을 먹어야 한다는 분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풀무원 농장의 양계는 그때 그만두었다. 대신, 주곡인 쌀 생산의 중요성과 생태와 환경에 순응하는 유기농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원경선은 부천에서 6·25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거두자는 가난구제라는 목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러나 1976년 양주로 옮기면서 부천의 바르게 사는 삶보다 나누는 삶에 힘을 쏟았다. 원경선은 사람의 죄는 소유와 욕심에서 온다이걸 없애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자는 게 공동체라고 역설했다

그는 농장을 꾸려 나가기 위해 만든 한삶회란 재단에 자기 재산부터 털어 넣었다.

마침내 한국 최초의 유기농 생산자 단체인 정농회가 19761월 부천 풀무원 농장에서 조촐하게 결성됐다. 초대 회장은 오재길씨가 맡았다. “이런 농사는 간접 살인이다라는 원경선의 극적인 이 한마디가 농부들을 정농회로 끌어들였다. 정농회가 한국의 대표적인 유기농 운동 단체로 성장하기까지 원경선은 전국의 농촌을 누비며 농민들을 만났다. 

당시 농촌사회는 가톨릭농민회나 기독농민회 등 농민 권리 찾기 단체들을 두고 우리도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원경선은 권리 찾기 데모는 그쪽에 맡겨 두고 우리는 생명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정리했다. 

제초제 대신에 내 손으로 김매고, 농약을 안 쓰니까 내 손으로 벌레 잡고, 화학비료를 안 쓰니까 내 손으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새벽에 농장에 나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었죠. 가난하고 일손까지 부족한 우리 농촌에서 결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자고 했으므로 나부터 나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양주에서는 양계와 양돈을 포기하고 모두 채소와 벼농사에 집중했다. 그러나 첫해는 참혹했다

모진 병충해가 약 안 친 채소밭을 걸레로 만들고, 벼 이삭을 반 넘어 훑고 지나가 쭉정이만 남겼다. 농약을 뿌리지 않아 채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도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의 살 만한 집이 몇백만 원 하던 시절에 1000만원어치쯤 손실을 보았다. 풀무원 농장의 형편이 그토록 딱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기농이 뭐 하자는 짓이냐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정농회를 탈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때마다 원경선은 고다니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유기농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장미다발을 껴안는 것이어서 장미를 껴안을 때마다 가시가 온몸을 찌르게 됩니다. 그 아픔을 모두 견뎌 내야 비로소 장미를 껴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도 원경선은 계속했다.오로지 사람을 살리자고 이런 농사를 시작했는데 땅이 나를 망하게 할 턱은 없다는 생각만이 의지였다.

삼 년째부터 땅이 조심스레 화답하기 시작했다.  

1g5000~1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고, 이들을 살리는 것이 유기농의 관건이라는 것도 터득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미생물이 죽지만,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다고 미생물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미생물도 생명체라 영양분을 먹어야 산다. 먹이는 다름 아닌 퇴비 같은 유기질 비료였다. 원경선은 해낸 것이다. 3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은 것이다. 

1980년대 전후로 매스컴이 유기농의 성공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서울 강남의 부인들이 풀무원의 유기농 소식을 듣고 양주까지 비포장 도로를 달려 채소를 사러 오는 일이 생겼다. ‘유기농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여서 그저 무공해라고들 했다. 

 유기농에 대해 정부는 무관심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유기농에 대한 입장은 크게 바뀌었다. 김성훈(金成勳) 농림부 장관은 농림부 내에 친환경농업과를 만들고 정농회를 비롯한 유기농 단체들을 지원했다

원경선은 1990년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원혜영 의원은 2010년 발간한 아버지, 참 좋았다에서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란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농부로 살고자 한 것,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는 것, 그것을 교육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것, 기아를 예측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 공동체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실천한 것에서 아버지와 피에르 라비는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했다.

그는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오빠나 여동생이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서 공동체 생활이란 게 이상은 좋지만 얼마나 엉터리인지 너무 실감나게 겪었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혜덕씨는 그 많은 공동체 식구들의 밥과 빨래를 해 대시면서 아버지의 말에 오로지 라는 말밖에 하지 않으신 어머니였다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자식이고, 이 사람들을 돌보는 게 내 달란트(talent)’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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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

카테고리 없음 2012. 10. 21. 20:11

월간조선: 

日帝下 조선인 特高경찰관들의 죄와 벌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411100021&ctcd=&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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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2만6677명의 日帝 경찰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약 40%인 1만619명이었다. 직급별로는 지금의 치안감급에 해당하는 道 경찰부장에 조선인이 1명, 경시급(지금의 총경)에 21명(日人 48명), 경부급(지금의 경정)에 105명(日人 433명), 경부보급(지금의 경감)에 220명(日人 790명)이었다. 나머지 조선인 경찰관 1만272명(日人 1만4775명)은 非간부급인 순사부장과 순사였다.   

  尹鍾華(윤종화·당시 황해도 경찰부장)는 일제 통치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道 경찰부장이었다. 충남 출신인 尹씨는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경시로 출발했다. 그는 1944년에 경찰부장이 됐다.   
  광복 직후 한국인으로서 日帝 경찰의 경시(지금의 총경급)까지 올라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확인되는 이는 다음과 같다. 

  
田鳳德(전봉덕·당시 경기도 보안과장, 광복 뒤 육군헌병사령관),

李益興(이익흥·당시 평북 박천서장, 광복 뒤 내무장관), 

尹宇景(윤우경·당시 황해도 송화서장, 광복 뒤 치안국장), 

孫錫度(손석도·당시 서울 성동서장, 광복 뒤 중부서장),

崔燕(최연·당시 경기도 형사과장, 광복 뒤 수도경찰청 고문)

盧德述(노덕술·당시 평남 보안과장, 광복 뒤 수도청 수사과장과 헌병중령),

崔慶進(최경진·당시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광복 뒤 수도청 차장), 

盧朱鳳(노주봉·당시 전남도 경시, 군정 때 전남 경찰부장) 
  
  1946년 1월12일자로 美 군정청 경무국은 경무부로, 각 課(과)는 局(국)으로 승격되었다. 趙炳玉(조병옥) 경무부장과 張澤相(장택상) 수도청장(서울시경국장에 해당)의 親日경찰 중용 소신이 드러난 것은 그 직후에 있었던 서울시내 8개 경찰서장 임명이었다.  서울시내의 8개 경찰서장 자리는, 반탁운동 때 8개 경찰서 서장들이 동조하여 해임됨으로써 비어 있었다. 중부서장으로 발령된 李九範(이구범)은 일제 때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로 있으면서 張澤相의 편의를 보아준 적이 있는 이였다. 
  
  용산시장으로 임명된 金亨鎭(김형진)은 일제 경부보 출신이었다. 광복 때 평북 박천서장이었던 李益興은 광복 뒤 남쪽으로 피신했는데, 동대문 서장으로 임명됐다. 일제 때 평남 영원서장을 지낸 李虎雨(이호우)는 마포서장으로, 경기도 경철부의 경부였던 尹箕炳은 수원경찰서장에서 서대문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수도청은 親日派 일색으로 되었다. 
  
  한편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는 광복 때 평남경찰부 보안과장이던 盧德述을 임명했다. 
  
  특별고등경찰(特高경찰·독립운동 및 좌익사범 전담부서) 고문경찰관의 대명사처럼 된 盧德述은 광복 직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다가 공산세력에게 붙들렸다. 그는 몇 달간 구금되어 있다가 1945년 말에 풀려나 남쪽으로 왔다. 
  
  親日 경찰관들을 趙炳玉 군정청 경무부장과 張澤相 수도청장에게 주로 소개한 이는 경무부 차장으로 趙炳玉 부장을 보좌하던 崔慶進과 수도청 고문으로서 늘 張澤相 청장 곁에 있던 崔燕이었다. 崔慶進은 평남 보안과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고(광복 당시엔 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崔燕은 북한에서 무장 독립군을 붙드는 데 이름을 날린 최고참 고등경찰관(독립운동 탄압 담당)이었다

  
  盧德述 수사과장은 1946년 4월6일 宋鎭禹(송진우) 살해범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게 됐다. 

  
 反民特委는 特高 출신들을 집중 수사
  
  1948년 9월7일 국회는 「反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와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했고,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고등관 3등급 이상 5훈 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와 헌병·헌병보·고등경찰의 職(직)에 있었던 자는 이 법의 공소시효(2년)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으며, 특별검찰부(특검)를 두는 등 서슬이 퍼런 법이었다. 이 법이 가장 중요한 표적으로 삼은 것은 일본인 경찰의 下手人으로서 동족을 탄압했던 特高경찰과 헌병 출신들이었다. 
  

  당시 수도청 사찰과 부과장 洪宅熹(홍택희)의 증언에 따르면 수도청 사찰과엔 약 60명의 형사가 있었고, 각 경찰서 사찰계에는 20~30명의 형사들이 있었는데,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찰 사찰과는 정보·공안기관의 기능을 겸한 권력 센터였다. 
  
  핵심 중의 핵심 자리인 수도청 사찰과장 崔雲霞는 일제 때 총독부 경무국과 종로경찰서 등에서 줄곧 고등계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자리에 있었다. 광복 때는 경부로서 종로서 고등계 주임이었다. 
  
  反民特委(반민특위)는 1949년 1월8일부터 反民法 해당자들의 검거에 착수했다. 1949년 1월31일까지 반민특위에 체포 구속된 사람은 21명. 金悳基, 李聖根, 盧德述, 河判洛, 李源甫, 劉徹, 노기주, 金泰錫, 崔燕 등 고등경찰 및 헌병 출신들이 被체포자들의 主流를 이루었다. 
      
 特高 출신들의 면면들
  
  일제 때 경남도 보안과장이었던 노기주는 광복 뒤에도 경남도 경찰부장을 지냈고 체포 당시에는 부산 영도의 조선경질탄도기 회사의 관리인이었다. 
  
  金悳基(김덕기·당시 60세)는 평안북도 고등과장으로 있을 때 吳東振(오동진)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 獄死(옥사)시킨 혐의로 구속되었다. 황해도 형사과장이었던 金克一(김극일·당시 62세)도 같은 날 구속됐다.

李聖根은 황해도 해주경찰서 순경으로 시작하여 평북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고 知事(지사)로 영전했으며, 광복 때는 매일신보 사장이었다. 

그는 나중에 反民특재 공판에서 『평북 고등과장으로 6년간 재직하는 동안 매년 약 100건(연루자 약 300명)의 사상사건을 취급했으며 만주 안동에서 독립단 간부 12명을 체포, 압송하여 처형케 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엔 上海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로 잠입, 치안을 교란시키려는 자는 내란죄로 처단했다』고 실토했다. 
  
  金泰錫(김태석)의 공소장은 일제 때의 고등형사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기소장에 따르면 金泰錫은 1912년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출발, 함북 웅기경찰서, 평남 광양만 경찰서, 평양경찰서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로 轉職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게 되었다. 

金泰錫은 1919년 9월17일 서울역전에서 사이토 신임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강우규) 義士를 체포, 결국 사형을 받도록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許炯(허형) 등 애국투사들도 그가 검거, 투옥시켰다.   
그는 이듬해 7월20일엔 밀정 金珍奎(김진규)를 이용, 밀양폭탄사건의 주동자인 李成宰(이성재), 尹小龍(윤소룡) 등을 체포하거나 혹독하게 고문하여 사건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또 1921년 10월엔 조선의용단 사건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1923金泰錫은 한국인으로는 최고 경찰직인 경시(지금의 총경급)로 승진, 경기도경 형사과장으로 임명됐다가 곧 군수로 나갔다. 연천·부천군수 등을 거쳐 1938년엔 경남도 산업부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지원병 募兵(모병) 시험관을 겸무하면서 청년 25명을 출병케 했다고 한다. 


정권의 走狗 역할 계속한 特高 출신들 

親日 경찰관들 가운데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 할 이들은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절도·강도 등 형사 출신들은 우리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일반 형사범들을 잡아넣었다고 변명할 수 있었으나 오로지 동족을 감시 탄압하는 것이 직무였던 고등계 형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고등계 형사로서의 존재 그 자체로써 이미 민족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광복 뒤에 경찰의 핵심부를 장악, 反民特委의 활동 때까지도 온존하고 있었던 것이 이들이었다. 反民特委日帝 고등계 출신인 수도경찰청 전 수사과장 盧德述을 반민법 해당자 및 중부서 고문치사 사건 피의자로 체포했다. 親日경찰의 간판격이면서 군정 경찰에서는 좌익색출에 공이 많았던 盧德述의 체포는 反民特委親日경찰의 대결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日帝의 조선인 탄압에 심부름꾼으로 일했던 特高 출신들은 건국시기엔 李承晩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좌익소탕에 기여했다. 위대한 독립투사였던 李承晩 대통령은 反民特委反共이 최우선 과제인 시대 상황을 모르고 반공기술자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룬다고 불만이 컸다

이 뜻을 알아차린 경찰은 反民特委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공작에 앞장섰다.


日帝 特高경찰 및 헌병 출신들은 李承晩 정부 시절, 경찰 사찰과와 의 특무대에 주로 포진하여 정치공작에도 복무했다.

 5·16 뒤에는 모씨 등 特高 출신자들이 정보부로 들어가 그 특기를 발휘했다

이들은 건국 및 護國(호국)의 시대에 좌익검거에 공을 세웠으나 정권의 走狗(주구) 역할을 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한계로 해서 무리한 수사로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때로는 이들이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 운동가들을 조사하는 사태도 벌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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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덕(田鳳德, 일본식 이름: 田中鳳德[1]1910년 12월 12일 ~ 1998년 5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간부이며 대한민국의 군인, 변호사이다

전봉덕은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다.[2]

사상범을 다루는 보안과에 근무했지만 미군정의 일제 경찰 경력자 우대 방침에 따라 경기도 경찰부의 보안과장으로 계속 근무했으며, 장택상의 비호를 받으며 미군정 경무부의 공안과장(1946), 경찰전문학교 부교장(1947) 등으로 승진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정과 함께 친일 경찰에 대한 탄압이 예상되자,

친일파 조직인 88 구락부의 같은 회원이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도움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제1기)하고 헌병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헌병 조직은 친일 경찰들의 도피처가 되었으며, 전봉덕은 자신을 체포하려했던 반민특위의 소장파 의원들이 연루된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헌병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본부장에 올라 이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1949년에는 대통령 이승만의 최대 정적인 김구가 자택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때 전봉덕은 안두희를 보호하면서 사건을 축소하고 배후를 은폐하는 쪽으로 수사를 마무리해버렸다. 이승만이 사건 발생 보고를 듣자마자 당일로 그가 수사를 담당할 수 있도록 헌병사령관으로 승진시킨 것을 놓고,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전봉덕은 이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법조계의 원로로 활동하였고, 법제사 분야의 저술 활동을 주로 벌였다. 1973년에는 한국법사학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맡았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 건너가 생활했다.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문인 전혜린은 전봉덕의 1남 7녀 중 맏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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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흥(李益興, 1905년 3월 10일 평안북도 ~ 1993년11월 27일)은 일제시대때, 친일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훗날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정권에 아부하여 고급경찰간부로 활동하였고 사사오입 개헌의 공로로 대한민국 제13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과 졸업한 후 총독부 경찰관이 되어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평북박천군 경찰서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는 치안국장, 경기도 지사등을 거쳐내무부 장관 직에 임명된다. 내무부 장관 시절 그는 야당(민주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특히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주모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유명하다. 1960년 4.19 혁명 후 체포되었지만, 이듬해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석방되었다.

199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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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도(孫錫度, 일본식 이름: 孫田宗明, 1910년 1월 14일 ~ ?)는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경찰 간부이며,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조선총독부 경부에 임명되어 경찰 간부로 근무했다.

전라남도 경찰부 경무과에서 근무하면서 전남경찰교습소 교관을 겸하다가, 전남 함평군 군수가 되어 관계로 잠시 이동했다. 이후 1940년대에 다시 경찰로 돌아와 도경시로 승진하여 황해도 경찰부 보안과장을 지냈다. 1943년을 기준으로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에 경시 계급에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1] 종전을 1주일 앞두고 경기도경찰부 회의실에서 간부 회의가 열렸을 때, 조선인 경찰로는 형사과장 최연, 보안과장 전봉덕, 성동서장 손석도 등 최고 간부만이 참석했다.[2] 이 자리에서는 일본 제국의 항복이 멀지 않았다는 고급 정보가 공유되었다.

미군정 지역에 남아 서울중부경찰서장을 지냈고, 이후 변호사를 개업하고 법조인으로 활동했다1965년에 성곡언론문화재단이 설립될 때 《조선일보》 주필인 최석채와 함께 준비 작업을 맡았다.[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경시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와 경찰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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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崔燕, 일본식 이름: 高山淸只, 1897년 3월 6일 ~ 1958년 11월 14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로, 본명은최령(崔鈴)이며 본적은 함경남도 함흥시 복부동이다.

1918년 함흥부의 함흥경찰서 순사로서 경찰 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말단 직책에서 출발하였으나 1922년 경부보 시험에 합격한 뒤 이후 함경도 지방 곳곳을 돌면서 경력을 쌓아 1942년 조선인으로서는 경찰 내 최고위 계급인 경시(警視)에 올랐다. 이후 황해도 보안과장을 거쳐 경기도 형사과장을 지내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그는 고등계 형사로서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일을 담당했으며특히 혜산 경찰서에 근무할 때 1938년 혜산 사건으로 박달을 비롯한 3백여 명의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악명이 높았다. 이 사건은 독립 운동이 활발한 만주 지역이나 중국공산당과 연계를 갖고 있던 함경도 지역의 독립 운동 국내 거점을 분쇄하려는 대규모 조직 사건으로 김일성과도 관련이 깊다. 최연은 이 혜산 사건에서 공을 세워 경찰 공로기장 훈장을 수여받았다.

광복 후 경찰 조직은 미군정의 전직 일제 경찰 등용 방침으로 친일 경찰들이 그대로 현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연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무과장으로서 경찰부장에 차례로 임명된 미군정 장교와 장택상을 보좌하며 인사에 개입하였다. 

그는 함경도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기에, 북조선에서의 친일 추궁과 체포, 재판을 피해 월남한 고등계 출신의 친일 경찰들을 대거 추천하여 이들을 남한의 경찰 조직 내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광복 당시 최연은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1]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이후 친일 경찰이 체포될 때 최연 역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된 뒤 공민권 10년 정지의 가벼운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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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진(崔慶進, 1908년 ~ ? ,創氏名:江東慶進)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경찰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공무원이었다.

함경남도 함흥부 출생이다. 함흥상업하교・부산상업학교(3년편입)에서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유학중이던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같은 해에 합격하였다. 또한 법학사(法學士)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함경남도 경부(警部), 평안남도 강동군수,평안남도 경시(警視)/경찰부 보안과장,朝鮮總督府事務官(學務局錬成課)등 경찰 공무원을 역임하였다.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1]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그대로 경찰로 등용되어 경찰국장 대리, 경무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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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봉(盧周鳳, 일본식 이름: 豊川守弘, 1900년 7월 25일 ~ 1945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로, 본명은 노주현(盧周鉉)이며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생으로, 전남 지역에서 발생한 광주학생운동 수사를 담당한 경찰이었다.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경찰관 시험에 합격하여 1920년대부터 전남 경찰부 보안과에서 일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남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을 색출, 수사, 고문하면서 공을 쌓아 경시 계급에 올랐다.

노주봉이 맡아 수사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29년의 광주 학생 운동, 1932년 김호선, 정동화, 윤승현 등이 검거된전남노농협의회 사건, 1934년 전남노농협의회를 재건하려다 김홍배, 황동윤, 이기홍, 오문현 등이 연루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1942년 기한도, 윤봉현, 강한수 등 학생들이 옥사한 무등회 사건(제2차 광주 학생 운동) 등이 있다.

노주봉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하기 전인 1945년 사망하여 공식 기록으로는 그의 활동상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들 사건에 연루되어 그에게 취조를 당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문 과정에서 그 잔인성이 극에 달했으며 사건의 조작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노주봉은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1]

일제가 패망해 물러간 후에도 미군정에 의해 전라남도 경찰부장에 임명되면서 친일 전력이 있는 경찰들을 등용하고건국준비위원회와 여타 자치적인 지역 조직을 분쇄하는 일을 했다. 일제하에서 고문 경찰로 악명을 떨치던 이들이 광복 후까지 득세하는데 대하여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던 중, 노주봉의 부하인 강홍섭이 시민들에게 구타당해 살해되었고, 그 역시 광주에서 김영일, 정판국, 김이현에 의해 암살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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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기(金悳基, 1890년 ~ 1950년?)는 일제 강점기의 고등계 경찰 출신 관료이다.

강원도 출생으로, 16년 동안 평안북도 경찰부의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하면서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독립 운동을 탄압하여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기소되었고, 최초의 사형 선고를 받은 바 있다.


김덕기가 체포, 송치한 사상범이 1천여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는 광복군총영 총영장을 지낸 오동진

 의성단 단장을 역임한 편강렬

참의부의 장창헌

'일목장군' 이진무

정의부의 김형출 등 유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장창헌과 김형출은 체포하면서 곧바로 직접 사살해 버렸으며, 

이진무는 사형 집행, 

오동진은 옥사, 

편강렬은 옥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 중 사망했다.


1923년 의열단이 현직 경찰인 황옥과 함께 계획한 대형 테러 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써 경찰 최고의 훈장인 경찰 공로기장을 받는 등 공을 인정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관료로 중용되어 1942년 평안북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1943년에는 농상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 후 소군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친일 인사 탄압을 피해 월남해 있다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고, 공판을 통해 7월 1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수감되어 있던 중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는 과정에서 이듬해 감형을 받아 풀려났다.

1950년 한국 전쟁 직전에 사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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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盧德述, 일본식 이름: 松浦鴻(마쓰우라 히로), 1899년 6월 1일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악질 친일 경찰로 널리 알려졌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일제 강점기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개성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훗카이도에서 취직을 위해 머물렀다.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추학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양주경찰서와 개성경찰서 경부로 재직 당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시국좌담회에 참석하고 지도하는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 총독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1941년 3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그해 6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으로 근무했다.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6월 전시체제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이외에 징병, 운송, 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되자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에서는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이사를 지냈다.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협력했다.


광복 이후

광복 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해방이후 극우 반공주의 활동 및 경찰 활동지내면서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라는 찬사를 얻기까지한다.

1947년 3월에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체포하고,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뺨을 때리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 

의열단출신이자, 김원봉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석헌은 김원봉이 이때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하였다.[1]

김원봉은 붙잡혀 갈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다. 이어서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한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했다.

의열단 동지 유석헌의 회고 증언내용中..

테러의 위협을 받던 김원봉은 결국 1948년 4월 19일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때 김구김규식과 함께 북조선으로 넘어간 뒤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월북 인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2]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수도경찰청 부청장의 신원보증으로 일시 석방되자 도주했다. 

도주 중이던 1948년 10월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등과 함께 친일파 처리에 적극적이던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인 김상덕,김상돈,권승렬,노일환,김응진,곽상훈,김병로,김장렬,오택관등을 비롯해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의원 지청천등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

1949년 1월 24일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이후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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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1년05월22일 제360호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에서 “저놈 잡아라”까지 고문과 은폐조작의 뿌리깊은 계보


사진/ ‘고문기술자’이근안과 그를 총애했던 박처원 전 치안감. 일제시대 악질 친일고등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왼쪽부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이냐?

친일잔재나 친일파 청산을 이야기할 때면 늘 받는 질문 중 하나가 해방된 지 60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이냐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꼭 친일파를 비호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정말 순수하게, 또는 단순하게 왜 과거에만 얽매여야 하느냐는 의문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친일잔재와 친일파의 문제는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해방 뒤 56년, 이 기간은 물리적으로 친일파들이 거의 다 죽거나 최소한 현역에서 은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잔재와 친일파의 문제는 과거사가 아닌 현실의 문제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정호용의 개그 “사람을 어떻게 때리냐”


사진/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라고 지시한 국무회의록 사본.


독자들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박종철군이 희생되었을 때 경찰은 처음 고문이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때 사건을 발표하면서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한 말,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역사에 남는 명언이 되었다. 사건 수습을 위해 새로이 내무장관이 된 정호용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말 역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학살 당시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말로 고문의 진상이 덮일 수는 없었다. 당시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자 경찰은 의사를 불러왔고, 그 의사 선생님은 기자들에게 사건현장에 물이 홍건했다고 경찰 입장에서 볼 때 정말 눈치없이 이야기해버린 것이다. 물고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발표하였다. 두명의 고문경관을 검찰로 송치할 때 경찰은 놀라운 동료애를 발휘했다. 똑같은 옷을 입힌 경관 여러 명을 동원하여 누가 범인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1987년 5월18일 세상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다. 광주의거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박처원이라는 이름은 1999년 11월 다시 화제의 초점이 되었다. ‘고문기술자’라는 희한한 별명을 가진 이근안의 도피를 지시하고 카지노의 대부 전낙원으로부터 ‘경찰발전기금’으로 10억원을 받아내 이근안에게 거액의 도피자금을 마련해준 사람 역시 박처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신문은 1947년 스무살의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박처원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으로 물러날 때까지 주변에 이른바 박처원사단을 형성했으며, 대공조직과 부하들간의 의리를 남달리 강조한 그가 고문에 의거한 대공수사에서 남다른 활동을 벌인 이근안을 총애했다고 보도했다.


48년 박성근 고문치사사건과 노덕술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경찰의 고문이 문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않고 출범한 대한민국 경찰의 탄생에서 고문은 어쩌면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이 있기 40년 전인 1948년에 이 사건과 너무나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사건의 주역은 악질 친일고등경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노덕술(盧德述)이었다. 

1948년 1월24일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박성근(朴聖根, 일명 임화)이라는 25살의 청년이 검거되었는데, 수도경찰청에서 노덕술의 지휘하에 그를 고문하다가 1월29일 오전 3시에 그를 죽게 한 것이다.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노덕술은 직접 곤봉을 들어 박성근의 머리를 무수히 난타했으며, 부하인 김재곤, 박사일 등을 시켜 실신 지경에 빠진 박성근을 3시간에 걸쳐 물고문하게 했다고 한다. 자기 조직의 우두머리를 죽이려 한 자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에서 고문을 행했지만, 정작 피의자가 죽자 노덕술 등은 무척 당황했다. 

이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2층에 있던 취조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저놈 잡아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박성근이 감시소홀을 틈타 도주한 것처럼 꾸미고는 사체를 한강으로 가져가 얼음구멍에 처넣었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에 비해 훨씬 세련된 조작극이 시작된 것이다. 

노덕술은 이 사건의 전말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보고했는데, <동아일보> 1948년 8월27일치에 의하면 장택상은 오히려 노덕술 이하 이 사건을 담당한 14명에게 “그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공로를 찬양하여 2월5일 최고 2만원에서 5천원까지 특별상여금을 주었다”고 한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이 뒤에 폭로된 것처럼 이 사건의 진상도 약 6개월 뒤인 1948년 7월 하순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군정 산하의 경찰조직으로는 조병옥(趙炳玉)이 이끄는 군정 직속의 경무부와 장택상을 수반으로 하는 수도경찰청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단독정부의 수립을 앞두고 조병옥과 장택상, 그리고 그들 휘하의 두 조직간에는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경찰 중 일부 인사는 민족적 입장에서 친일경찰들이 새 정부의 경찰에서 요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런 입장도 박성근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이 폭로되는 데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성근 사건이 뒤늦게 폭로되자 당시 수도경찰청의 안살림을 담당하는 관방장으로 있던 노덕술은 1948년 7월24일 경무부 수사국에 구속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金泰日)은 경무부를 방문하여 사무상 필요 때문에 노덕술에 문의할 일이 있으니 피의자의 신병을 잠시 인도해달라고 요청하여 노덕술을 데리고 간 뒤 노덕술이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수도경찰청이 조직적으로 노덕술을 빼돌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무부는 26일 노덕술을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이에 대해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은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경무부 수사국이 발표한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의 진상은 “사실무근이며 완전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경무부는 김태일 부청장이 노덕술을 빼돌린 것은 민심을 현혹시키고 경찰질서를 문란시킨 것이라며 그에게 정직처분을 내리고 그를 사문위원회에 회부하는 한편, 이만종(李萬鍾) 수사국 부국장의 명의로 담화를 발표하여 김태일의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했다. 이 담화에서 이만종은 김태일이 노덕술이 체포된 뒤 수도청을 대표하여 수사국에 와서 “열성 끝에 치사한 것인 만큼 만일 사건을 취급한다면 수도청이 전복될 우려가 있으니 노덕술 이하 관계자를 정치적으로 관대히 해결해달라”고 간청한 사실도 밝혔다. 

이 귀에 익은 논리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ㆍ김근태씨 고문사건ㆍ박종철군 사건 등 주요 고문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 수뇌부가 대공경찰의 사기 운운하던 것의 원형이 된다.


친일파 처단 주장하면 공산당?

노덕술 사건이 경찰 내에서 친일경찰 및 그 비호세력과 민족적 양심을 지키려는 세력간의 대결구도로 발전하려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는 이만종 부국장의 담화가 나간 다음날 노덕술을 빼돌린 김태일에 대한 정직처분을 취소하고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사문위원회도 취소했다. 

그리고 노덕술을 체포했던 수사국장 조병계(趙炳契)와 부국장 이만종에게 사표를 강요했다. 이들은 8월10일 발표한 사임 성명에서 “금번 조각의 인물구성을 볼 때 우리의 양심을 살리기에는 너무나 환경과 조건이 불리하다”면서 “전일 수사국에서 적발한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에 있어 군정의 책임자도 아닌 자가 불필요한 간섭과 제한을 가함으로써 사건 취급상 중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노덕술의 구명에 앞장선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尹致暎)이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장관에 임명된 것을 두고 “직접 권한이 없는 군정에도 간섭함으로써 부패분자의 구명운동에 동분서주하였거늘 하물며 자기 권한하에 있는 신정부에 있어서는 가히 추측할 수 있다”며 자신들이 왜 물러날 수밖에 없는가를 밝혔다. 

일찍이 경찰 내에서 친일경찰의 척결을 주장하다가 파면당한 최능진(崔能鎭)의 사례와 함께 우리 경찰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찰이 이 지경이 되고 있을 때 달아난 노덕술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이근안이 자기 집 골방에 숨어지내고 박노항이 아파트를 얻어 숨어 지낸 것에 비해 노덕술의 도피 아닌 도피행각은 너무나 화려했다. 노덕술의 은신처는 다름아닌 수도경찰청 청사였다

그는 이렇게 “숨어”(!) 있으면서 무장경관의 호위 속에 경찰관용차를 타고 상관이었던 외무장관 장택상의 집과 자신을 비호해주는 내무장관 윤치영의 집 등 현직 장관의 집에 수시로 드나드는 등 화려한 외출을 즐겼다. 

노덕술이 도피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 외출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큰 오산이다. 노덕술은 경찰 내에 득시글거리던 또다른 노덕술들과 함께 일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8년 7월 제헌국회가 개원하자 비록 이남만의 단독선거에 의한 반쪼가리 국회였지만, 국회는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의 처리를 서둘렀다.


반민법 제정의 열기가 뜨겁던 8월27일 국회에는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공산당”이라는 내용을 담은 ‘애국청년’들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반민법은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와 이를 지휘한 자는 최고 사형, 그리고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그러나 친일고등경찰들이 보기에 너무나 스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특위는 과거 신간회 활동을 했던 제헌의원 겸 특위조사위원 김명동(金明東)의 책임 아래 노덕술 체포대를 구성했다. 노덕술 체포대는 노덕술이 애첩인 관훈동의 기생 김화옥의 집에 드나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화옥의 집에 들이닥쳐 노덕술이 당시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李斗喆)의 효창동 집에 은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체포대는 곧바로 이두철의 집을 급습하여 노덕술을 검거했다. 박성근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난 지 꼭 1년 만인 1949년 1월24일의 일이었다. 체포 당시 노덕술은 4명의 호위경관을 거느리고 6정의 권총과 34만여원의 거액을 지니고 있었다.


실패로 끝난 친일파의 조작사살음모


사진/ 99년11월 체포되어 검찰로 송차되는 이근안.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않고 출범한 대한민국 경찰의 탄생에서 고문은 어쩌면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다.(이정용 기자)


노덕술이 체포된 다음날 세상은 다시 한번 놀랐다. 

백민태(白民泰)라는 테러리스트가 서울지검을 찾아와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노덕술과 또다른 노덕술들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난수(崔蘭洙),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洪宅喜), 중부서장 박경림(朴京林) 등이 반민특위 간부 등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하려 해 사살했다고 위장하려 한 암살음모를 고백하면서 이들로부터 받은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암살대상자 명단을 제출한 것이다. 백민태는 바로 이들이 선택한 하수인이었다. 

그런데 백민태는 항일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테러리스트였기에 백민태를 하수인으로 고른 것은 이들 암살모의자들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암살음모는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화된 1948년 10월 하순에 시작되었다. 

뒤에 반민법 위반으로 구속된 친일파 홍찬(현재 스카라극장인 약초극장 사장)의 집에서 노덕술, 최란수, 홍택희, 박경림 등이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의원들을 암살하기로 모의하였고, 이후의 실무는 최란수와 홍택희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 암살음모는 백민태의 고발로 미수로 돌아갔지만,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국회의원을 제거하려는 친일파의 끈질긴 공작은 마침내 1949년 5월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실현되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이승만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재직시 직접 그를 이화장으로 불러 “자네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을 뻗고 잔다”고 격려한 이승만은 노덕술이 검거되고 얼마 뒤인 1949년 2월12일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1949년 6월의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과 해산,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이 어떤 분위기하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노덕술은 반민특위 습격이 있기 직전인 1949년 5월29일에 열린 재판에서 암살모의 사건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아 풀려났고, 이듬해까지 계속된 박성근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사건 재판에서도 역시 같은 이유로 무죄방면되었다. 그는 비록 무죄로 풀려났으나 경찰에 복귀하기는 힘들었다.

 노덕술은 군으로 무대를 옮겨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가 창설한 이른바 노덕술 사단은 한국 대공경찰의 모태가 되었고, 그 사단의 막내가 바로 뒷날 자기 사단을 만들며 대공경찰의 대부가 된 박처원, 남영동을 만들고 고문은폐조작의 배후에 서서 고문경관들에게 도피자금과 위로금을 전한 박처원이었다.


똑같은 논리, 똑같은 수법…

역사는 반복되는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으로서 참 답하기 싫은 질문이지만, “저놈 잡아라”에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에 이르는 고문과 은폐조작의 뿌리깊은 계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친일잔재 청산이나 민주화의 염원이 빨갱이들의 주장이 되는 현실, 그리고 고문경관을 싸고 도는 경찰들의 눈물어린 동료애 앞에서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하는가? 

종철이 아버님 말씀처럼 “아무 할말이 없데이…”다. 노덕술은 가고, 박처원도 가고, 이근안도 사라진 마당, 그러나 그들이 남긴 씨는 아직도 이 땅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그들과 똑같은 논리, 똑같은 수법으로 민주인사를 탄압한 자들이 남아 있는 곳이 어디 경찰뿐이겠는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행했다는 독일에서도 신나치가 생겨나는데, 단 한번도 과거청산을 하지 못하여 미청산된 과거의 만물상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

친일잔재의 청산은 이 어정쩡한 민주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군부독재잔재의 청산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친일문제는 5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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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화요일 밤.

부정부패와 비리, 힘의 논리. 결과가 권력획득과 물질적 번영의 가시적 성과로만 나오면 그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관련된 모든 논의를 잠재우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의 뿌리 중 하나는. 친일문제

결국은 헤게모니싸움인데, 자신들의 토대인 아버지, 할아버지의 친일을 어떻게 인정하고 사죄할까.

인정하는 순간. 권력은 저쪽으로 넘어가니.


Posted by 메모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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